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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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2일 금요일

경제적 인간=현실의 인간?


 현대의 경제학은 엄밀히 신고전주의(neoclassical)적 미시경제의 세계관에 기초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합리성의 가정은 특히 개인이 가지는 재화에 대한 선호에 대한 가정들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이기성은 개인의 선택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최적화의 경로를 통해 실현된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됩니다.
 
 많은 연구자들, 특히 행동경제학을 포함한 인간의 ‘완벽한’ 합리성과 이기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 학자들이 ‘인간’이 그러한 속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 숙고를 거듭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한 개인이 일대일 간, 혹은 한명 대 다수의 관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게임이론’을 기반으로 해서 설명해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보여드릴 주제를 위해 한 게임을 부득이하게 설명하는 것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후통첩게임(Ultimatum game)
 
 최후통첩게임은 두 사람이 하는 게임입니다. 편의상 참여자 두 사람을 A, B라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임의 방식은 무척 간단한데요, A에게 얼마간의 금액을 줍니다. 편의상 10만원이라고 하죠. A는 그 금액을 10만원의 한도 내에서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데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B에게 일정금액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을 B가 수용해야만 A가 B에게 준 돈을 차감한 만큼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B는 제안된 금액을 받게 됩니다. 만약 B가 조건을 거부하게 되면, A가 원래 가졌던 10만원도 증발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윤태준님과 최후통첩게임을 한다고 해보죠. 제가 10만원을 가지고 있고, 그러면 저는 이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일단 5만원 씩 나눠가질까? 하지만 태준님이 경제적 인간이고, 그러므로 이기적 속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0원만 아니면 어떤 조건이든 자기에게는 이익이 되니 받아들일 거 아냐? 그러면 나는 나눌 수 있는 한 최소한의 금액으로 주자. 그럼 1원.”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면 태준님이 과연 받아들이실까요? 제안을 거부하고 판을 깨버리실까요? 아마 후자 쪽이 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여쭤보진 않았습니다만;) 이 결론은 처음보시는 분들에게는 꽤 충격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경제적 인간이신가요?
 
 1970년대 이후 게임이론 연구를 하는 많은 기관, 특히 대학에서 이 게임이 여러 차례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수용된 게임’의 경우 5:5의 배분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그 외에 제안자가 7 의사결정자가 3으로 배분하는 것도 꽤나 흔한 형태였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결정자가 선택했을 법한 99:1의 배분은 대체로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게임을 하는 순간 딱 한 번만 만나고 다시는 안 볼 두 사람에게 딱 한번 만 게임을 시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죠.
 
 경제적 인간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연구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을 시도했습니다. 대학에서 하는 연구라 젊은 사람들만 대상으로 해서 그런 결과가 도출된 게 아닌가, 실제 큰돈을 가지고 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거다. 여러 번 하면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제안자와 수용자의 순서를 바꿔서 해보면 어떻겠느냐 등 그 논점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점들에 대해 연구자들은 금액의 크기와 현실성, 게임의 반복적 양상, 순서에 대해 충분한 통제를 가한 뒤에도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구하는 집단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피하기는 어려웠죠. 자발적 참여자들을 모으기에는 대학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로 얼마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경제적 인간에 가까운 지를 밝히기 위해, 세계 각지의 오지마을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인류학자들과 게임이론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 17명이 공동으로 하나의 프로젝트(Henrich et al, 2005)를 시작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인류학자들에게 최후통첩게임과 몇몇 다른 게임을 소개해주고, 인류학자들은 그 게임을 오지마을의 사람들에게, 즉 그 게임을 ‘처음 들은’ 사람들에게 실험해 볼 수 있었고, 경제학자들은 그 결과를 인류학자들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오지에 있는 마을을 찾아갔는지 먼저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도에 나온 마을 중 Lamalera라는 마을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작은 어촌인데요, 이 분들은 작은 배에 마을의 남자들이 여럿 올라타서 가까운 바다에서 포경(捕鯨)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촌락입니다. Au라는 마을도 마찬가지로 어촌마을인데, 여기도 Lamalera와 비슷하게 촌락사람들 간의 협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곳입니다. Ache라는 마을은 유목(normadic)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결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라 여겨도 무방할 듯합니다.
 
 제가 집단, 혹은 사회에 대한 은유를 드리는 까닭은 물론 그러한 사회의 속성이 이 최후통첩게임의 결과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최후통첩게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의 scale은 얼마의 비율로 제안이 이뤄졌는지를 이야기하는데요, 이를테면 0.2인 경우 제가 8만원을 받고, 상대방이 2만원을 받는 제안입니다. 그러니까 offer scale이 0.9면 상대방에게 9만원을 주고, 제안자는 1만원을 받는 식이죠. 까만 점은 어떤 제안이 이뤄졌었는지를 graphical하게 나타내고, 그 크기는 빈도를 나타냅니다. 이 표에는 Pittsburgh같은 미국의 도시도 통제집단으로 포함되어있습니다.

 절반씩 나눠 갖겠다는 의사결정이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그 외에 6:4, 7:3 정도의 배분이 흔히 보이는 양상입니다. 또한 드물지만, Lamalera, Ache같은 마을은 상대방에게 더 많이 제안하는 이른바 ‘이타적인’ 곳도 있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Pittsburgh에서는 5:5제안으로부터의 deviation이 여타 다른 오지마을에 비해 작은 편이고, 대체로 5:5제안이 많은 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절반씩 나눠가지겠다는 것은 최소한 인간이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에 있어, 경제적 이익 이외의 요소를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공정함 또는 정의, 도덕, 공감 등 뭐라 부르건 인간의 경제활동은 경제적 이익만 고려되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죠. 좀 더 넓게 해석해보면 ‘나는 fair하지 않은 것은 정의라고 여기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으로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할 수 있느냐.’, ‘내가 더 많이 가졌을 때 다른 사람입장이 염려되어서’ 같은 판단은 개인이 사회를 고려할 때, 양적균형을 고려한 의견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경제학에 비유할 지는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인 듯합니다. 다만 이것을 온정적 간섭(paternalism)의 근거로 삼을 수는 있어 보입니다.
 
이타적 성향을 보이는 곳은 주로 집단적 유대가 높은 마을입니다. 상대방을 더 쉽게 신뢰할 수 있을 때 이타적 성향이 발현되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면에는 상대방, 내지는 사회의 힘과 협력해야 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그것은 상대방이 잘 살 수 있어야 나의 생존과 번영이 보장되는 삶인 경우에 그런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ittsburgh의 사례를 보고 어째서 ‘경제적 인간’이 많아 보이는 미국의 도시에서도 왜 5:5의 제안이 많이 생길까는 궁금증이 드셨을 거라 생각이듭니다. 경제인이 왜, 어째서 상대방에게 5:5의 제안을 할까요? 흥미롭게도 ‘경제적 인간’을 상징하는 시장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구로서의 영향력이 클수록 평균적으로 더 높은 offer를 보입니다.


 명백하게 ‘공정함’은 시장이 확대될수록 더욱 주목받는 가치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제가 감히 해석해보건데, (이전 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장, 혹은 경제학이 가지는 ‘진보성’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중에 한 가지가 ‘모든 사람은 경제적 개인으로서 동등하다’라는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권리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타인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여러 사람의 의사가 모여지는 합의기구라는 의미에서 ‘사회’라는 틀이 무너지면 ‘시장’도 존속하기 힘들 테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합의 할 수 있는 시장에 대한 인식, 혹은 (제도주의에서 말하는)협의의 ‘제도’는 시장을 원천적으로 지지하는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최정규 교수님이 주로 하시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Reference

Henrich et al.(2005), "Economic man" in cross-cultural perspective: Behavioral experiments in 15 small-scale societie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 Vol 28, pp. 795-855.
 

댓글 2개:

  1. 마지막 문단을 특히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사실 시장경제가 그 제도적 근간을 따져들어가고 보면 순수한 이기심만으로 존속되기 어려운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체제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경제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배려가 있어야 하니까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 수록 노예제가 사라지고 보통 선거권이 확대되며 개인 평등의식이 고취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이타심은 상대방의 '최소'한의 몫을 인정해 주는 쪽으로만 발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금액을 훨씬 키웠을 때 정말로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1만원이야 반반 나누겠지만 저 같으면 1억을 준다고 할땐 한 1000만원만 떼줄 것 같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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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늦은 답글 죄송합니다. ^^;;

      1. 제기해주신 문제 때문에 경제활동에서 fall-back position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불거진 갑-을 관계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추후에 여기에 대해 자세한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2. ‘최소한’이라는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게 보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것도 좋은 주제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지적해주신 부분 중에, ‘만원은 5:5로 나눠가질 수 있음에도, 1000만원 이상의 큰 돈은 적게 분할하겠다.’는 것은 사람들마다 크리티컬 포인트가 다를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때문에 일관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 같은 억대 부자들이 돈을 많이 벌고도 그 돈을 기부하는 게(그것으로 명성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닐 수 있음에도) 오히려 돈을 많이 벌면 더 많이 분할하겠다는 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 쓸 말은 아니지만) 매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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