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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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6일 토요일

주식 투자와 경제학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노벨 경제학상은 빠질 수 없는 연말 이벤트겠지요? 지난 14일 스웨덴 과학원은 이번 연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시카고 대학의 유진 파마, 라스 한센 교수 그리고 예일 대학의 로버트 쉴러 교수를 선정하였습니다. 역시나 학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큼 유력 수상자로 오르내리던 분들입니다. 노벨 위원회 측은 이들의 주요 업적으로 금융시장에 대한 실증연구를 꼽았습니다.

   사실 금융이라는 카테고리로 함께 묶이긴 하였지만 파마와 쉴러는 서로 대척점에 선 두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번 노벨상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특히 금융시장의 효율성을 둘러싸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지요. 파마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대부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주식시장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즉각 반영하기 때문에 과거 정보에 기초한 어떠한 투자전략으로도 리스크 대비 초과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게 요지입니다. 반면에 쉴러 교수는 여러 실증 논거를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비판해왔습니다. 투자자들에겐 심리적 측면이 존재하며, 단순한 정보를 활용한 투자로도 유의미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마침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 만큼 오늘은 주식시장과 그 효율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우리나라 주식 시장에 대해서도 검토해보려 하는데요, 효율적 시장 가설에 대한 이론적 논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고 이를 기각할 수 있을 법한(?) 투자전략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침팬지 vs 펀드 메니저

   주식 차익거래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투자자들의 꿈이었습니다. 사실 주식은 기본적으로 배당금을 기초로 한 상품입니다. 회사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돈을 투자하는 대가로 주주들은 매년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배당금으로 공여 받습니다. 경영에도 관여를 하고요. 이때 배당금에 대한 권리를 투자자들끼리 서로 사고파는 곳이 바로 주식시장입니다. 그래서 주식가격이라 한다면 단순히 미래 배당금에 대한 가치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당연히 회사의 수익 전망이 좋을수록 그 주가도 높게 형성되겠지요. 또한 시장에서 저평가된 주식을 사서 나중에 되파는 식으로 차익거래를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주식가격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차익을 거두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저의 경험적으로도-_-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좋은 회사의 주식은 이미 가격에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또 저평가 되어 보이는 주식에 실제로는 제가 모르는 악재가 숨어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 전문 투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과거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는 침팬지에게 수건을 던지게 해 주식을 구매하는 방법을 실험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 전문 투자자들의 포트폴리오 수익률과 비교해보자 상당 수는 별반 차이가 없거나 침팬지가 오히려 나은 결과를 보였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러한 연구 동기로 출발한 것이 바로 효율적 시장 가설입니다. 유진 파마 교수는 1965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주식 가격은 일종의 랜덤워크를 따르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또 실증적으로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식시장은 현재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으므로 미래의 주가가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핵심 주장입니다.

   그는 정보 반영의 정도에 따라 주식시장의 효율성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첫째 약형 효율성은(Weak form efficiency) 현재 주가에 과거 주가 변동에 대한 모든 정보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 이미 지나간 주가 패턴에 기초한 투자전략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흔히 사설 주식 방송을 보면 쌍봉형이나 T형 캔들, 장대양봉 등 괴이한 이름으로 투자 조언을 해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약형 효율성 하에서 이런 추세 분석은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준강형 효율성은(Semi-strong form) 현재 주식 가격에 회계 자료, 뉴스 등 시장에 공시된 모든 정보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 추세 분석뿐만 아니라 시장 정보를 활용, 저평가된 주식을 발굴하는 가치투자 또한 그 효과를 상실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전문 펀드 메니저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형 효율성은(Strong form) 현재 주가에 시장 정보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의 비공개 정보까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쯤 되면 투자를 통한 차익실현이 사실상 불가능 하다고 본 것이지요.

   효율적 시장 가설이 제기된 이후 파마 본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쏟아냈습니다. 이를 위해 Event Study를 활용하기도 했고 초과 수익률이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 회귀 모형을 통해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금융 시장의 효율성은 8~90년대에 들어서 주류적인 견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때 대체로 합의되었던 주장은 주식시장이 준강형 효율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우연한 경우에 차익실현의 여지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내재 가치를 정확히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인덱스 펀드가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인덱스 펀드란 고도의 투자 분석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펀드와 달리 시장에 있는 모든 기업의 주식을 통째로(weighted average) 구매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차피 시장은 효율적이라면 분석에 드는 수수료나 거래비용이라도 아끼자는 것이지요. 실제로 일류 투자은행의 펀드라 할지라도 인덱스 펀드의 수익률을 이기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쉴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이에 대한 반대 논거를 꾸준히 제기하였습니다. 특히나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던 부분 중 하나는 몇 가지 단순한 과거정보에 의한 투자가 실제로 굉장한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가/회사이익 비율(P/E ratio)을 가지고 쓴 투자 방식, 과거 몇 년간 부진했던 주식(Looser stocks)에 투자하는 방식, 심지어 12월달에 아무 주식이나 샀다가 1월에 파는 방식(January Effect)만을 가지고도 과거 몇 십 년간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속속들이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투자자들의 심리적인 요소가 주식시장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사례들도 다수 제시되었습니다. 예를들어 투자자들은 주식가격이 하락할 때는 손해 실현을 피하기 휘해 매각을 미루고, 상승할 때는 빠른 수익 실현을 위해 매각을 앞당긴다는 것입니다. 이후 학계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었던 분기점은 2000년 초반의 닷컴 버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2년만에 400%나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하여 원래 수준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연구는 금융에 대해 효율성을 넘어, 보다 행태학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2. 똑똑한 침팬지 되기 

   이처럼 효율적 시장 가설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거를 살펴 볼 때, 대체로 주식시장은 효율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를 기각할 수 있을 법한 몇 가지 투자전략을 구상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한정해 본다면 그 점이 더 분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장 내에 개인 투자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보니 주가 형성 과정에 노이즈가 많이 끼어 있다고 볼 수 있고, 또 회계자료가 선진국에 비해 불투명한 점, 공매도가 허가되지 않은 점 등 시스템적으로 효율성을 저해할 요소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주식 가격이 해당 기업의 정보를 정확하기 반영하지 못 한다면 특정 투자 기법을 통해 리스크 대비 초과수익을 거두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투자자들의 심리패턴이 체계적으로 주식시장에 나타나는 경우 그 활용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래 도표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포트폴리오입니다. 기본적으로는 Looser Stock을 사는 전략인데, 05년부터 12년까지 나흘 간격으로 제일 많이 떨어진 KOSPI 주식 10개를 사고 나흘 뒤에 파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식을 사는 비율은 그때그때 마다 10개 회사의 시가총액을 가중 평균하였습니다. 이를 만약 반복했다고 했다 치면 그 결과 7년동안 누적수익률이 9607%에 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벤치마크인 코스피 인덱스 수익률보다 월등히 높은 결과인데, 여러모로 뭔가 저의 투기 욕구를 자극하는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 함정은 존재합니다. 일단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경영난으로 인해 KOSPI에서 퇴출된 기업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실제 투자를 할 때는 나흘 간 제일 많이 떨어진 주식 중에 파산하는 주식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시뮬레이션에서는 그 중에서 미퇴출된 10개 기업만 취사선택 되다 보니 상당한 리스크가 회피된 거라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투자 간격을 나흘로 하는가, 일주일로 하는가 혹은 투자 개시일을 어느 때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누적 수익률이 제로가 될 수도, 몇 천 퍼센트씩도 뒤바뀔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 9607%는 그런 고위험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르지요. 또 마지막으로 가중평균을 해서 투자했다고 했는데, 이를 실제 실현하는 것에는 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같이 주당 100만원을 상회하는 주식은 적은 돈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모로 재미는 있었던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위의 결점을 보다 잘 다듬는 다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효율적 시장 가설을 기각하는 한 근거가 될 수도 있을라나요. 아니면 나중에 진짜 투기를 이렇게 해볼 지도 모르지요. 쪽박을 차고 한강에 가지는 말아야 할텐데요.

3. 이어지는 수수께끼

   지금까지 금융시장과 그 효율성에 대해 여러 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주식시장에는 매 순가 큰 자금이 오가는 만큼 그에 대한 분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학계와 업계를 가리지 않고요. 파마와 쉴러, 한센 교수는 그 안에서 경제학적 이해를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2013년 노벨상 수여은 이를 기리기 위한 현시대의 징표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듯 보입니다. 현 세기에 들어와서는 국제금융시장이 통합이 더욱 가속되어 이젠 세계 각 국의 작은 움직임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까지 영향을 주는 형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동경제학적 접근은 주식시장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집단행동이 결부되면 주식 가격은 도무지 합리적인 예상 범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푸는 것은 더욱 어려운 숙제가 될런가요? 18세기 남해 회사 (The South Sea Company) 주식에 투자하였다가 20,000 파운드의 손실을 입은 아이작 뉴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I can calculate the motions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people”

예나 지금이나 똑똑한 머리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주식가격이었던 모양입니다.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찾아낸 현대인의 슬픈 단면


   
 이 글은 제가 졸업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발제를 위해 쓴 글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체제에 대한 일종의 대안경제체제와 같은 것을 제시하고 싶은데
 앞서 수많은 선배들이 그러셨을 듯이 일단은 막연하고 막막하기만 하네요
 생각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뿐이고, 사실 이 글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서
 업로드 하는 것 자체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일단 글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이 글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을 달겠습니다.
 경연의 메인스트림과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소 어긋날 수 있으나
 앞으로 이 문제점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에 대해서 연재작 비슷하게 업로드 하고 싶어 이 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많은 양해를 구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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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핵심 스토리를 모두 담고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읽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누군가 영화 의 안톤 시거(Anton Chigurh)를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정상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시거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다. 누구도 그와 마주칠 것을 예상하지 못 하며, 누구도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그렇기에 그가 가져다주는 죽음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맞이하게 돼 있는 죽음이란 존재론적 숙명이 바로 안톤 시거였던 것이다.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의 접경지대. 일반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배경 속에 드러난 그곳의 기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음껏 욕망을 채우라! 그 지상명제 앞에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무의미하며 도덕과 윤리가 무색하다.
   삶이 죽음을 불러오고 죽음이 삶을 증거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가치의 혼돈지대에서 안톤 시거는 홀로 경계선에 서있다. 그가 곧 삶이며 그가 곧 죽음이다. 그의 손을 거쳐 삶과 죽음은 비로소 둘로 나뉜다. 그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우연이지만 결과는 필연적인 죽음이다. 시거에게 살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은 허무함, 그 단어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죽음. 그들이 무엇을 바라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든지 간에 시거는 한순간에 그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 모스(Moss)는 드넓은 사막지대를 관통하는 지상명제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우연히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발견하고 문제에 휘말린다. 200만 달러는 모스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가 목숨을 걸고 돈 가방을 사수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모스가 욕망을 좇는 것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은 누구나 추구하는 지상목표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이만큼이나 풍성해진 데 욕망이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만약 사람들이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돌도끼로 토끼를 때려잡으려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모든 역사에 걸쳐 더 많은 것을 바라왔고 그 결과 오늘날 휘황찬란한 문명을 일궈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스의 욕망을 쉽게 긍정할 수 없다. 왜일까? 모스는 그 가방을 못 본 체 지나가야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가?
 
   가장 쉽게 들 수 있는 이유로 그렇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정당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들 수 있다. 우연히 얻은 남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면 형법 360, 점유이탈물횡령조항에 의거하여 형사 처벌받는다는 딱딱한 말을 굳이 늘어놓을 없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길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면 경찰서로 가져다줘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주인을 잃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채이고 있던 지갑과, 시체더미가 쌓여있는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돈가방 사이에 닮은 점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가방을 마땅히가져야만 하는 사람은 누가 되는가? 갱단? 멕시코 마약 딜러?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 정당성이란 기준을 들어보면 그 어느 쪽도 그 가방을 가질 권리가 없다. 선량한 사람들을 갈취, 협박 하여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그 돈에 정당한 재산권을 부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정대로 황야의 무법자들이 그 돈을 가져가든, 우연히 지나가던 행인 모스가 그 돈을 가져가든 정당성 측면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에게 그 돈을 가져갈 어떤 권리가 있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원래 주인을 정의하기 힘든 물건이므로 적어도 그가 갱단의 점유이탈물을 횡령했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조금은 모호하지만 그런 만큼 더 현실적인 대답은 모스가 200만 달러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영화 중 모스가 아내에게 당신이 200만 달러를 잃어버렸으면 언제쯤 포기할 것 같아?’ 라고 묻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갱단의 돈을 건드린다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거는 일이다. 경찰서로 곱게 인도해도 목숨이 남아나기 힘들 판에, 그것도 모자라 그 돈을 들고 도망친다는 건 정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고 뒤통수도 한 대 시원하게 후려갈겨준 후 탭댄스를 추며 도망치는 거나 다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스가 들고 도망친 ‘200만 달러에는 과연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목숨은 물론 소중하지만, 그에 앞서 200만 달러로 할 수 있는 일들, 이를테면 넓직한 고층 오피스텔과 최고급 세단,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떠서 만든 명품 의류 등이 먼저 떠오를 것이란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200만 달러가 아니다. 30년도 더 전의 200만 달러다)
 
   모스가 잘못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200만 달러가 안톤 시거라는 절대적인 죽음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거는 그 욕망과 관련이 없다. 탐욕으로 가득한 드넓은 사막지대에서 홀로 욕망이 아닌 다른 것을 상징하는 남자가 바로 안톤 시거다. 그러므로 시거 역시 200만 달러를 좇아 모스를 찾아왔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서술이다. 안톤 시거와 모스가 연관된 매개가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는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다른 우연으로 모스가 2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얻고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갑작스레 벼락부자가 되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 제작자의 의도와 맞지 않다. 감독 코엔 형제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뜬금없이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모스의 이야기가 아니였다. 그들의 의도는 모스와 안톤 시거를 엮어 극명하게 잘 드러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모스와 시거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만약 처음부터 모스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못 본 체 그냥 가던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론은 사후적인 것이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그 순간 그 시점에 신내림을 받지 못 한 평범한 인간을 덩그러니 세워둔다면 누가 미래를 알 수 있을 거란 말인가? 안톤 시거와 같은 분명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피해갈 수 있는 죽음이 눈 앞에 기다리고 있을거란 막연한 기대, 혹은 근거가 불충분한 확신을 품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모스에게 그 200만 달러가 어떤 가치를 지녔고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기에 그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박판 위에 칩으로 내걸었던 걸까? 달리 말하자면 거대한 물질적 부에 목숨을 건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앞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깊은 생각 없이 말하자면 돈에 목숨을 거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라고 할 수 있다. 목숨 있고 돈 있지 돈 있고 목숨 있냐, 라는 식의 말은 너무나도 명쾌하고 쉬워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이 문제가 그렇게 쉬운 답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우리가 돈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네 인생을 위해서다.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나 쉽게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은 돈이 수단 혹은 도구로서의 가치만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실 돈 그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아주 미미하다. 하다못해 메모지로도 써먹기 힘든 작은 종이쪼가리 그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종이쪼가리는 우리네 경제체제에서 법률로 보장된 구매력을 지니고,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유용하다. 왜 구매력이 우리에게 유용한가? 그 구매력으로 우리의 욕망(desire)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하는가? 바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 ** 두산백과사전의 정의 ; 생물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개체의 동인(動因). 이것을 선천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 본능이라고 한다 ) 인생이란 게 그 자신의 본성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곧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다소 거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가? 소박하게는 하루하루 먹고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에서부터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모두에게는 작든 크든, 분명하든 불분명하든 어떤 삶의 목표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목표 역시 어떤 의미로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에는 목숨마저 걸 가치가 있을 테고, 돈은 대부분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도깨비 방망이다. 그러므로, 만약 돈을 얻어 가진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관점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스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효자였고, 그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200만 달러라는 거금이 필요했다고 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모스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앞서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 예시가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요소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바꿔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 영화에서의 모스 역시 나름대로 사람들의 동정을 얻을 만한 동인을 갖고 있었다. 이동식 컨테이너에서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열악한 생활 여건에서 벗어나 아내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가장의 소박한 소망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게 100%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을 제시한다면 오늘날 힘든 현실을 하루하루 버텨가는 우리네 가장들은 또 얼마나 깊게 공감할 것인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그 위대한 결심을 잠깐이나마 떠올리며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와 실제 현실이 분명히 다른 부분이 한 가지 있다면 돈이 우리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건 구매력에 한정된다.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돈으로 사기 힘든 것들, 이를테면 돈독한 형제애, 깊은 우정, 뜨거운 사랑과 같은 것들은 인생을 걸고 돈을 얻어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문제는 모스가 200만 달러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들 속에 200만 달러가 결코 가져다줄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돈이 그의 모든 욕망을 다 채워줄 수 있으리란 큰 착각을 했고 그 결과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없는 곳에 인생을 배팅했다. 200만 달러는 안락한 쉼터, 포근한 흔들의자, 따뜻한 고기 스튜, 목넘김이 훌륭한 맥주와 같은 것들을 보장해 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가 그 돈을 위해 내팽개쳐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까지 보장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그가 안톤 시거라는 운명을 빗겨갈 수 있었다고 해도 그는 결코 그가 200만 달러로 채우려 했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론을 조금 강하게 말하자면 그가 200만 달러에 목숨을 건 짓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모스의 최후는 그 누구보다 더 허무해야만 했다. 심지어 그는 안톤 시거라는 운명을 맞이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죽음은 왜 그렇게 허무하게 나타나야만 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영화 속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의 모습은 원시적인 폭력이 비일비재하고 사람들의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인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등,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것만 같다. 그러나 과연 그 둘 사이에 정말로 큰 차이가 있을까?
 
   겉모습은 훨씬 더 세련됐을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는 가진 재산이, 직장에서 받는 연봉이, 타고 다니는 차가, 사는 동네가 곧 그 사람을 말해주는 시대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들이 상징하는 구매력이 어떤 한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과거보다 훨씬 더 배금주의가 팽배한 시대다. 그런 만큼 모두들 그 구매력을 갖기 위해 하루하루 인생을 걸고 있다. 그 모습이 모스(Moss)와 꼭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을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나방(Moth)이 된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혹해 자기 몸을 태워버릴 불덩이로 뛰어드는 부나방.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영화를 보며 대부분의 관객들은 모스가 우여곡절 끝에 잔혹한 살인마 안톤 시거를 쓰러뜨리고 승리를 쟁취하길 염원한다. 쉽게 인정하기 힘든 일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과 모스의 모습이 묘하게 겹쳤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감정이입이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그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향해 유한성을 바치는 자들이다. 돈으로 그 모든 걸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돈에 사로잡혀 있다. 영원히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 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모스가 200만 달러라는 상징적 욕망의 궁극체를 끝내 얻지 못 하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코엔 형제가 시거와 모스를 엮어내고 모스의 죽음을 그토록 허무하게 연출한 까닭은 분명하다. 우리들에게 바로 이 암시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톤 시거는 어떤가? 안톤 시거 역시 오늘날 변함없이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유한성을 떨쳐낼 수 없는 한 그는 분명히 찾아오도록 결정돼 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운명의 의미이다. 영화 속에서 그를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같은 말을 한다. ‘내게 이럴 필요 없잖아요.’ 안타깝게도, 안 그럴 필요도 없다.
 
   그 누구도 합리적 인간이 효용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걸 반박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면 이것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는 명제가 된다. 합리성을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요즘 사람들이 효용 극대화를 부의 극대화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도구적 합리성을 의미한다면 오늘날 현대인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목적 달성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지 못 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전황이 기운 전선에서 싸우던 장군이 패배가 가져올 비난을, 후퇴를 명함으로서 받게될 문책을 두려워 퇴각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우린 언제까지고 우리가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아니, 믿으려 노력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스펙에, 학점에, 취직에, 승진에, 그렇게 매달려서 결국 얻고자 했던 어떤 걸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얻고자 했던 건 대개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부모님의 행복, 화목한 가정, 아름다운 사랑, 영원한 우정, . 우리가 결국 얻고자 했던 건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은 객으로 밀려나고 수단이었던 돈이 주인의 자리를 꿰찬다.
 
   언젠가 결국 우리는 안톤 시거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뭐가 될까? 영화 속에서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계좌에 만사천 달러가 있으니 그거 받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할 것인가? 그런 게 그때가 되면 전혀 무의미하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순간 떠오르는 게 통장 잔고나 자신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수많은 직함들뿐이라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네 인생이란 게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질 것인가! 그리하여 결국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모두가 그에게 했던 그 말뿐이지 않을까?
 
 
 *** 글 내 몇몇 표현을 저도 모르게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데 오래 전 기억들이라 출처가 정확하지 않아 모두 주석을 달지 못 했습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바로바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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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표면적으로나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보니, 우리나라에 대해서 생각나는 바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인생관,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우리나라가 굉장히 독특하단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어찌 보면 그게 바로 문화의 차이고 국민성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문화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버리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일단은 김세직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그토록 교육과 인적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막연하게 그러면 좋겠다~ 수준이었지만, 실제로 우리나라가 영미권 국가들이나 프랑스, 독일처럼 더 잘사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 해야할 과제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답이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다른 분들께서는 이미 한참 전에 깨달으셨을 문제를 저는 이제서야 알게 된 거죠 ^^;
 
 저는 개인적으로(누가 이미 주창한 개념을 저도 모르게 표절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국가 경제의 3요소로 부존 자원(천연자원, 자연환경, 인구 등을 포괄하는), 국가 브랜드, 생산성(기술 수준 등)을 꼽는데요, 부존 자원도 변변치 않고, 국가 브랜드도 주요 강대국들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우리나라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생산성인데...
 
 사실 이게 굉장히 막연한 개념이고 더군다나 이미 높은 수준에 있는 나라들을 따라가기 어려운 개념이다 보니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옛날 쌍팔년도식 발전 방식처럼 노동 투입시간을 늘리고 인건비를 절감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늘리는 거죠. 이런 상황에 대해서 3, 4공화국 시절(박정희 정권) 얘기 하시면서 지금도 그렇게 해야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다고 믿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일단 제가 부족하니 거기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은 유보해 두고요.
  그런데 이게 과연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인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주요 선진국들이 그러고 있진 않고 말이죠. (그렇다고 그게 답이 아니란 얘기는 또 아니지만 말이죠)
 
 
 아, 그러고보니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
 
 위 글에서는 문제점을 개개인에게서 찾고 있는데요. 물론 저도 이 상황이 개개인이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 제 현실을 돌아봐도 그렇죠.)
 
 애초에 오늘날 사람들이 무조건 돈을 많이 벌겠다고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일 뿐이지.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돈에 눈이 멀어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다, 이 멍청한 놈들!' 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위 글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글에 불과한 것일 뿐이죠.
 
 하지만 저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이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사회를 만들어가는 건 (가끔씩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일단은 교과서적으로 그렇다고 치고) 개인이고, 그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게 바로 사회거든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기업들이 월화수목금금금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게 바로 그 불쌍한 소시민들이라고 봅니다.
 
 '성장지향주의'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과거처럼 7~8%대의 비현실적인 경제성장을 그리워하고 그래서 정부는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발표할 때마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가 3~4%대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만 해도 저는 기적이라고 봅니다. 저는 크루그먼 교수의 말을 믿는 사람이라서요. 우리나라의 성장이 대부분 양적 성장에 기인한 것이므로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말거라는 주장 말이죠.
 물론 그게 기적이라면 거시경제학에서 말하는 '추격이론'에 따라 주요 선진국들을 따라잡게 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되버리고 말테지만, 그건 사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못 받아들이니까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으로 '안되면 되게하라'는 식으로 과거 퇴행적인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답은 '양'에 있는 게 아니라 '질'에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야 지지율의 노예이다보니, 분배를 표어로 둔 정부나 성장을 표어로 둔 정부나 정체성 가릴 거 없이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친기업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사람들 먹고살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거란 말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친기업적인 정책이란 교과서에 나오는 그 말과는 조금 많이 다른 의미죠)
 
 여기까지가 '지극히 개인적인' 제 견해였고요. 이를 정리하자면 결국 문제는 사람들이 아직도 높은 경제성장률에 대한 환상을 잊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합법적으로 근로자들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버린 거란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 나라가 잘 되서 'trickle down effect'로 덩달아 잘먹고 잘살길 바라는 마음에 높은 경제성장률을 원한다면 거기서 배금주의의 냄새를 찾을 수 없을까요?
 
 저는 본질적으로는 거기서도 '돈을 많이 벌면 결국 행복해질거다!' 라는 식의 막연한 생각이 숨어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냅다 뭉뚱그려 돈, 돈, 돈,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써서 올려 버린 것이고요.
 
  개개인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적 구조가 바뀌길 기대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 구조를 바꾼 결과 나타나는 부작용은 우리가 이미 과거에 많이 겪어 봤잖아요. 이를테면 계급제가 철폐될 당시에 있었던 혼란이라든지, 광복 직후에 부를 분배하는 방식에서 나타났던 혼란이라든지 말이죠.  어떻게 보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이 문제들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런 만큼 일단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못 한다는 거죠. 당장 법으로 앞으로 매주 40시간 이상 근무시키면 절대 안 된다! 라고 못박아도 과연 그게 쉽게 될까요?
 
 그래서 저는 어떤 구조적인 접근 보다 우선 개인에서부터 출발해보자는 생각으로 오늘날 현대인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써보았습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저 자신에 대한 비판이 가장 앞섰네요. 그러다보니 현대인이라는 복잡다난한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일반화해버리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쓰다보니 핀트가 조금 많이 엇나가서 원래 담고자 했던 주제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결국 문제점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어떤 Social Pressure 문제를 떠나서 말이죠. 거시경제학에서 Micro foundation이란 중대한 개념을 쌓아올린 Lucas 교수님의 지혜를 빌어, 오늘날 우리 사회 문제 역시 개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야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럴듯한 대안까지 제시하고 싶지만... 아직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흔한 답안밖에 떠올리지 못 하겠네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