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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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당신이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은?


바로 전 글에서 roundmidnight님이 기회의 평등을 논할 때, 지능에 의한 소득 차이는 보전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를 간단한 게임이론 모형을 통해 보이셨지요. 이 모형에서 '기회의 평등'이란 사후적으로 관측된 소득을 다시 동일하게 나누는 것으로, '소득재분배'란 사전적으로 정해진 세율에 따라 세금을 걷어 이전하는 것으로 정의하셨습니다. 핵심은 천재가 노력하는 상황에서 범인이 직면하는 유인체계였던 것 같습니다. '기회의 평등' 상황에서는 범인이 노력하지 않는 편이 더 높은 효용을 얻지만, '소득재분배' 상황에서는 노력하는 편과 효용이 동일했습니다. 바로 노력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죠. ‘기회의 평등정책 아래서는 범인이 얻는 효용이 관측되는 소득의 격차가 커질수록 늘어나며, 천재의 전략이 주어진 아래에서 범인은 실제 효용격차는 같지만 태만할 때 관측되는 소득의 격차가 늘어나, 얻게 되는 몫이 커지는 것입니다. 반면 소득재분배의 상황에서는 범인이 소득 이전으로 받는 몫은 천재의 관측되는 소득에 정비례하므로, 자신의 전략과는 관계없이 천재가 어떤 전략을 택하는지에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부러 태만할 유인이 발생할 이유가 없었죠.

하지만 설정하신 모형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결과의 평등’과 구분하기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 다 노력을 했을 때 같은 소득을 받는 것 뿐 아니라 한쪽이 노력을 하고 한쪽이 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관측되는 소득을 동일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같은 주장을 다른 근거를 들어 하고 싶습니다.
 
원래 이 논의는 John Roemer기회의 평등개념을 접하고 블로그 구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되었습니다. Roemer는 인간의 소득을 결정하는 요인을 환경적인 요인과 노력 요인으로 나누고, 오직 노력에 의해 소득이 결정되는 사회를 이상 사회로 꿈꿉니다. 그는 환경적 요인을 부모의 소득, 지능, 외모 등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모든 요소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노력또한 완전히 개인이 통제하지 못한다고 보아, 노력의 leveldegree를 나누어 구분합니다. 노력의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라, 같은 환경 집단 사람들에서 몇 분위 안에 드는 노력을 하느냐가 진짜 노력을 가늠할 기준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우선 저는 뢰머가 말하는 degree of effort 개념에 실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뢰머는 사람들을 상황에 따라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같은 사람들끼리는 동일한 소득을 받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사회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상황은 IQ 이외에는 동질적이고, IQ80인 그룹과 120인 그룹이 있을 때 80 그룹 중 소득이 상위 10%, 50%, 90%인 사람과 120 그룹 중 소득이 상위 10%, 50%, 90%인 사람의 소득이 동일해야 하는 것이죠. 같은 그룹 내에서의 상대적인 위치가 진짜 노력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상황이 같은데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노력을 할지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저는 뢰머식의 기회의 평등개념이 인간의 개별성을 인위적으로 희석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봅니다. 지능에 따른 소득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능을 개인의 소유로 볼 것인가와 직접 닿아 있는 문제입니다. 위에서 말한 같은 상황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노력을 하는 이유는 개인의 선호가 달라서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가와 소득 사이의 선호가 개인마다 다른 것이죠. 그렇다면 왜 부모의 소득, 지능, 외모, 체력 등 다른 요소는 개인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 선호의 차이를 특별히 개인의 고유한 엑기스로 인정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여가와 소득 사이의 선호도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 외모, 사회관계 등 온갖 요소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회의 평등을 위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 중 일부에 대해서는 그것이 소득에 미치는 효과를 보정해야 하겠지만, 과연 재능까지 포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정체성이 희석되는 문제 이외에도,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따라 직업 선택을 할 유인을 없애 효율성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일반 대중이 불평등하다고 느끼고 분노하는 상황 또한 누군가 재능은 없는데 인맥으로 성공한 때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때문에 성공한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 노력과 능력이 정말 쉽게 구분되는 개념일까요? 저는 머리가 좋은 것과 공부를 좋아하는 것을 실제로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수학 수업을 들으면 바로바로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수리적 사고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수학적인 바탕을 많이 쌓아왔고 그것이 반영된 결과일까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하고 각각 자신의 그룹에서 같은 백분위에 위치할 때, 그것이 두 사람의 동일한 '노력'의 결과이며, 동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만일 노력의 실체가 노력에 따른 '비효용'이라면) 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사회 전체 후생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개인적 비효용을 얻었느냐'를 기준으로 사회적 보상 체계를 만들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강한 기회의 평등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적 세계와 달리 현실 세계에서는 중립적인 정부경제적 행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경제적으로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자발적 거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연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세계에서 기회의 평등을 인간의 손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준의 부의 재분배가 필요할 텐데, 과연 완력 없이 가능할지 걱정이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이란, 사람들의 초기 '상황'을 인위적으로 동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오직 '사회 전체 후생에 얼마나 기여했느냐'를 기준으로 보상받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기회의 평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블로그 멤버들과 얘기하던 중 지능도 기회의 평등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태어날 때 부터 부자로 태어난 사람과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의 차이를 사회에서 보정해 주는 것이 "정의롭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똑똑한 (예를 들어 좋은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보정해 주는 것이 옳지 않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먼저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다른 멤버들도 여기에 대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도 매우 흥미로울 것 같군요.

  논의의 초점을 좁히기 위해 몇 가지 가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먼저 선천적인 차이는 지능의 차이 단 한가지라고 가정합시다. (지능의 차이를 보정해 준다면 외모의 차이, 성격의 차이, 건강의 차이, 키의 차이 등 수많은 차이들도 보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렵지 않냐는 질문은 일단 접어두고 논의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지능의 차이는 완전히 관측 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어느 한 부분이 지능의 차이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라고 가정합시다. 또한 지능은 "천재" 와 "범인" 의 두 가지로 완전히 분류된다고 가정합시다.

  이러한 가정 속에서 저는  지능도 기회의 평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지능의 차이가 우리가 기회의 평등에 흔히 포함시키는 부모의 경제력의 차이와 다른 점이 거의 없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능의 차이를 그렇다면 어떻게 보정해 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와 "범인"의 소득 격차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둘의 소득차의 원인은 지능에서 날 것으로 생각하여 둘의 소득차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각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지능에 대한 보정의 방법일 것입니다. 즉, 지능으로 얻은 소득은 똑같이 나누어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소득을 좌우하는 데에 지능 이외에 "노력"이라는 요소가 존재하고 "천재" 집단의 지능의 효과가 발휘되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노력했을 때만 가능한 상황을 상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분배를 주관하는 사람은 노력의 정도를 관측할 수 없고 노력에 따른 "무형적" 비용 또한 관측할 수 없는 상황을 또한 상정하였습니다.

 링크된 저의 짧은 글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와 같은 분배 방식은 천재집단이 노력을 하지 않는 쪽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열심히 노력할수록 그 대가가 "범인" 집단에게 흘러가니 노력의 인센티브가 별로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보인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제력만을 고려한 분배의 방식은 천재집단을 노력하게 만들면서도 분배의 효과는 첫번째 방식에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굳이 "지능의 효과를 통제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적당한 경제력에 대한 분배규칙을 세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쓴 글은 간단한 내쉬 균형을 이용하여 이를 보였습니다. 앞으로의 기회의 평등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가 더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선거 경제학



얼마 전 서울시 교육감의 상대후보 매수와 관련한 논란, 선거비용 보전 문제 등등을 보다 보면 경제학도로서 이러한 의문이 든다. 선거비용 보전 및 당선가능성이 정치 출마선언에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것처럼, 선거에도 어느 정도 경제학적인 직관이 작용할 수 있을까?
 
이하에서는 ‘선거와 관련된 경제학’을 예시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편의상 사람들은 어느 지역구의 ‘국회의원 선거’ 에 출마하고자 한다고 가정하자. 이 때 득표율 15%의 경우 선거운동비용으로 사용된 금액이 전액 보전이 되고 15%~10%의 경우 선거운동비용의 절반만 보전받을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규정이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을 결정하는 보상은 다음과 같다.
 
당선시 보상: A (당선후 명예, 지위, 기대소득 등의 보상)
낙선시 손실: ①득표율 15% 이상의 경우 = 0
②득표율 15%~10% 의 경우 = 선거비용 C/2
③득표율 10% 의 경우 = 선거비용 C
 
cf>이런 제약조건 하에서 개인은 득표율 15% 이상의 경우 선거비용을 극대화하려는 유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 득표율 10% 미만은 노릴 유인이 없다. 선거인이 충분히 많은 경우 10%~15% 정도의 당선율로도 당선될수 있겠으나, 선거출마인이 7명 이하라고 한다면 결국 득표율 10%~15% 정도를 노리는 것은 최적이 아니다.
 
이때 개인의 득표율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함수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자:
 
개인의 득표율(%) = [(100/n) * (β/b) + (β/b) *ln (C/ε) ]
(단, β = 개인의 기본적인 지지수준, b = 다른 사람들의 평균적인 지지수준, C = 선거비용, n=출마자의 수, ε= 다른 출마자의 평균 선거비용, )
 
cf>이때 개인의 기본적인 지지수준(선거운동과 무관한, 개인의 경력 및 지지기반과 같은 고정적인 변수) β와 다른 사람들의 평균적인 지지수준 b는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β=개인에 대한 사회의 절대적인 평가 혹은 인기도라면, β/b = 개인에 대한 사회의 상대적인 평가 혹은 인기도하고 할 수 있다. 또한 β의 값은 개인의 지지율(%) 그 자체와는 무관한, 단지 상대지지도 β/b를 유도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설정한 값임에 유의하라. 실제로 우리는 선거운동 직전의 사전조사 및 지지율을 통해 상대지지율 β/b 를 구하면 충분한 것이며 β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cf2>선거운동비용은 예비후보자 등록, 즉 선거일 120일 전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실제로 일정 기간을 벗어난 경우의 선거운동비용은 아무리 많이 지출되었다고 할지라도 국가에서 보전해주지 않으므로, 이러한 가정이 일견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cf3>여기서의 100/n 은 총 득표율 100%를 단순히 출마자의 수 n 으로 나눈 것이다. 완전히 평균적인 출마자의 경우 100/n % 의 득표를 얻을 것이라는 직관에 바탕을 두었다.
 
또한 당선될 확률은 주어진 득표율 하에서는 출마자의 평균득표율인 100/n 으로부터 얼마나 이탈해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당선될 확률을 변화시키는 변수는 고정상수인 [100/n * (β/b)] 를 제외한 (β/b)* ln (C/ε) 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은 β/b를 어떻게 추정할 수 있을까? 해답은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직전의 ‘사전평가’를 통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예비후보자 등록기간은 선거일 120일 전인데, 예비후보자 등록 이후 본격적으로 선거운동비용이 발생하기 시작하므로, 예비후보자 등록을 마친 후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지지율 사전조사 발표자료를 통해 B/b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모든 사람들이 선거운동비용을 0원 지출한 케이스기 때문에 선거운동비용이 득표율에서 차지하는 비율 (β/b)* ln (C/ε) 는 무시해도 된다(모든 개인의 C = 0 = ε 라고 하면, ln(C/ε) = 0 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예비후보자 등록을 마친 직후 사전조사에 의한 지지율은 [100/n * (β/b)] 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시> 만약 출마자가 5명인 어느 구역에서 A 후보가 예비후보자 등록 직후의 조사에서 24%의 지지율을 얻었다면 어떠한가? 이때 100/n = 100/5 = 20% 이다. 따라서 이 후보의 상대지지율 (β/b) 는 1.2가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β/b) >0 인 한 (즉 선거운동을 통해서 득표율이 오히려 더 떨어지는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모든 출마자는 다른 출마자의 ε를 예상하고 그보다 더 높은 선거비용을 동원하려고 하게 된다. 특히 득표율이 10%가 넘지 않는 경우 선거비용은 고스란히 자신의 위험손실이 되기 때문에, 각 출마자는 자신의 득표율을 계산하여 자신의 가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선거비용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형에서는 출마자의 숫자가 또한 출마의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개인의 득표율은 [(100/n) * (β/b) + (β/b) *ln (C/ε) ] 이라는 식으로 도출되며, 여타 변수나 상수가 동일할 경우 출마자 n 이 증가함에 따라 본인이 15%(선거비용 손실 없음)의 득표율을 획득할 가능성은 감소한다. 따라서 어떠한 출마자가 자신의 상대지지율 (β/b) 나 선거운동동원력(C/ε) 이 평균수준이라고 추정할 경우, 출마자가 7명을 넘는 순간 예상득표율은 15% 이하로 떨어지게 되어 낙선시 선거비용의 50% 가량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출마자가 10명을 넘는 순간 예상득표율은 10% 이하로 떨어져 선거비용이 전액 손실로 이어진다. 따라서 출마자가 7명을 넘는 경우 자신의 자금동원력이나 상대지지율이 탁월하지 않는 한 출마할 유인이 감소한다. 출마자가 10명을 넘는 경우에는 어지간한 위험애호가가 아닌 한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이미 출마를 확정한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선거비용을 보전받기 위해 최소한 예상득표율인 [(100/n) * (β/b) + (β/b) *ln (C/ε) ]을 15% 이상으로 끌어올릴 유인이 발생한다. 또한 15%를 넘는 경우 선거비용이 전액 보상이 되므로 선거운동비용을 1원 늘릴 경우 자신의 지출은 국가의 선거비용 보전에 의해 완전히 상계되는 반면 예상득표율은 증가하므로 무조건적인 이익이다. 따라서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한 많은 선거비용을 투자할 유인이 생긴다.
 


  
따라서 이러한 선거경제학적 모형에 따르면 직관은 다음과 같다:
 
1>개인은 다른 출마자 후보에 비해 자금동원력이나 상대적인 인지도 혹은 평가가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는 한 출마할 유인이 크게 감소한다. 특히 출마자가 7명을 넘는 경우 ‘평균적인 지지율과 선거운동비용을 지출하는 출마자’ 가 기대하는 득표율이 15%이하가 되어 (100% / 7 = 14.xx %) 선거비용이 손실로 처리될 가능성이 증가하므로 출마유인이 급격히 떨어진다.
2>그러나 일단 출마한 선거인의 경우, 득표율을 15% 이상으로 기대하고 진입한 사람이 대다수이므로 이들은 득표율을 최대한으로 증가시킬 유인이 존재한다. 따라서 선거비용의 증가가 개인의 득표율을 ‘감소’ 시키지 않는한, 개인은 자신의 재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선거운동비용을 지속적으로 지출할 유인이 생긴다.
 
이러한 직관은 대체적으로 맞는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각 지역구마다 평균적인 출마자수는 3~6명 정도이며, 출마자가 7명을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한 일단 출마한 후보자의 경우 필요이상으로 돈을 사용하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더러는 자신의 득표율을 잘못 평가한 사람의 경우 가산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득표율이 15% 혹은 10%에 미치지 못해 선거비용을 일부 혹은 전부 보전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모형에 의한 직관에도 약점은 있다. 즉 예비후보자 등록후 120일간의 선거운동 및 특정후보의 지지선언 혹은 포기 등을 통해 후보자의 상대적인 평가 (β/b) 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인 평가의 변화로 추정되는 것도 결국은 선거운동을 통해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전체적인 예상득표율은 비교적 간단한 함수인 [(100/n) * (β/b) + (β/b) *ln (C/ε) ]를 통해 예상하고 행동을 선택한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중산층은 붕괴하고 있는가?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F.Fukuyama) 는 중산층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최근 세계적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로 인해 그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중산층이 최근 들어서 붕괴하고 있는지 필자는 어제 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왠지 이 주제를 잘 연구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 선행연구를 찾아봤는데 역시, 내가 생각해 낸 ‘재밌는 주제’라면 제가 맨 처음일 리가 없겠지요. <중산층의 추이, 이탈원인과 대책> (강성진, 이우진 공저. 2010, 고려대학교 경제연구소.) 라는 연구 보고서가 있더군요.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최근의 연구이고 기존 문헌 연구나 실증 분석도 이해하기 쉽게 잘 된 것 같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훑어보시길 추천합니다. 2장을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위 보고서는 제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논의의 전개 방향이 달랐어요. 우선 여러분은 중산층 붕괴 현상을 검증하려면 데이터를 어떻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위 보고서의 2장 2절에서는 중산층의 비중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현재 중산층인 가구가 앞으로 어떤 소득분포를 차지할 것인지의 이행행렬(Transition Matrix)을 구해서 분석하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중산층 붕괴는 일단 현재의 중산층이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소득이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그 미래 소득의 분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소득분위가 전체 소득 분포에서 중상 정도 구간에 있는데 미래에는 이 소득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갈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높아지더라도, 그 기대되는 소득의 분포가 더 넓어진다면 중산층은 오히려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요? 
특히 여기서 제가 생각한 것은 첨도(kurtosis)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중산층일 때 미래에 기대되는 소득의 분포가 어느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는지 (a direction of skewedness)가 중산층이 붕괴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만약 현재의 중산층이 10년 뒤에 중산층(또는 상류층)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계산되더라도 이상치(outlier)등의 존재로 인해 분산이나 첨도가 아래쪽으로 크게 나온다면 그건 중산층 붕괴현상의 징후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한 점은 과연 데이터를 분석할 때 해당 가구 소득의 추이만을 보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중산층 붕괴를 거론할 때 많이 나오는 얘기가 ‘나는 지금 중산층인데 내 자식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산층 붕괴 현상을 볼 때도 그렇다면 세대 간 소득 이동성 (Intergenerational Income mobility) 문제가 중요하겠지요. 위 보고서에서 사용한 노동패널데이터(KLIPS)는 기존 가구에서 자녀등이 분가해 나갈 때 그 추이도 함께 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모가 중산층일 때 분가해 나간 자녀 가구의 소득 추이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이 2세대 가구는 20~30대 젊은 연령대라는 것을 고려해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 그 상승 추세에 초점을 맞춰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기존의 중산층에서 분가해 나간 가구가 중산층에 재진입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에 초점을 맞춰서요.

여기까지가 중산층 붕괴현상에 관한 저의 짧은 의견이었습니다. 굳이 후쿠야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사회가 얼마나 안정적이냐를 판단하는데 있어 그 사회의 중산층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영위하는지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실증분석 능력이 있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KLIPS나 다른 자료를 통해 위 두 가지 주장을 한 번 검증해 보고 싶은데 이건 미래의 과제로 일단 남겨야 할 것 같네요. 중산층 붕괴가 실재하는지, 혹 이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지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ps.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같이 오면서 이 글을 쓰는데 좋은 토론을 나눠주신 블로그 필진 A님께 특히 감사를 전합니다.

2012년 10월 10일 수요일

약탈적 금융사회?

며칠 전 제윤경 씨의 『약탈적 금융사회』라는 책을 통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책의 요점은 경기침체, 집값 하락 등의 외부환경 변화에 따른 채무불이행에 대한 책임을 채무자가 너무 일방적으로 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올해 8월 올라온 Karam Jo님의 글 『실패에 대한 책임은 너만 지어라?』에도 이와 비슷한 견해가 담겨있었죠. 하지만 저는 과연 유사시 은행[1]이 지금보다 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하는가에 대해 끝끝내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는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리스크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아 보았습니다.

채권, 채무관계는 계약입니다. 채무불이행 시 담보를 압류하고, 그 처분액으로 채무를 상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계약 안에 들어있고, 그 내용에 채권자와 채무자가 모두 동의했다면 디폴트 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계약을 이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이 제기된다면 그 반론은 필연적으로 계약이 불공정했음을 주장해야겠지요. 계약은 협상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협상력의 차이가 계약에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자금시장의 공급 측면에서 다소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은행의 협상력이, 완전경쟁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금 수요자 개개인의 그것보다는 훨씬 강할 것입니다. 이는 채권, 채무 계약이 불공정한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권한만큼 그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말인데요. 돈을 빌린 사람은 자기 소유가 아닌 돈의 일시적인 처분권한을 얻습니다. 은행은 그 대가로 일정기간, 일정량의 이자를 수취할 권한, 만기 시 대출금을 돌려받을 권한, 채무불이행 시 담보 압류 및 매각을 통해 손실을 보전할 권한을 얻게 되지요. 차입자의 권한이 곧 은행의 의무(책임)이며 은행의 권한이 차입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따라서 양자의 권한의 크기를 비교했을 때, 그 권한의 크기가 같다면 책임이 공정하게 분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2]. 현재가치법으로 계산하고, 대출금리로 현금흐름을 할인하면 두 권한의 현재가치는 같아집니다[3]. 오히려 담보가치 하락과 그에 따른 개인의 파산신청 등의 리스크를 고려한다면 은행의 권한이 좀 더 제한적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러한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서 채권 추심 행위 등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4].) 독자분들께서는 이 문단 내용에 따르면 은행이 금리를 아무리 높게 잡아도 책임은 공정하게 분배되는건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실 것입니다. 금리가 높다면 차입자가 내야하는 비용이 많으므로 대출을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과점체제 하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하신다면, 그것 역시 타당하겠지만 그것은 책임의 분배 문제가 아니라 독과점에 따른 가격 형성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가격(금리)을 통제하거나 신규은행의 진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지 현재의 책임 분배 상황에 손을 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최근 하우스푸어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매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할지, 민간 부문에서 부분적 채무 탕감을 통해 해결할지는 모르지만 그 골자는 채무상환능력을 잃어버린 하우스푸어를 지원해주는 것입니다. 과거 은행의 영업경쟁이 어떠했으며, 집값의 상승기조가 어떠했든간에 하우스푸어는 장차 대출 원리금을 초과하는 수익을 얻기 위해 자금을 빌려 집을 산 사람들입니다.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개인의 자산 증식을 위해 내린 의사결정의 결과가 좋지 않자, 금융권이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고 몰아가는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계부채 1000조 시대, 그 충격파를 줄이기 위해서 각종 해결책을 정부 및 채권채무자가 합심하여 내놓는 것은 국가경제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나, 마치 은행이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양해야겠습니다.


[1] 이하 본문에서는 은행채권자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2] 공정한 책임의 분배는 다음 비례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A의 권한 : A의 책임 = B의 권한 : B의 책임에서 외항과 내항이 끼리끼리 같은 경우이므로, A, B 양자의 권한이 같아야만 비례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3] 채무불이행 확률이 있지만, 어차피 담보 처분 후 채무상환액을 초과하는 금액은 채무자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물론 인권을 유린하는 채권추심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 보장 측면에서 근절되어야 합니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내가 벌면 남도 좋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라는 말, 다들 한번 씩 들어보셨나요? 대선이 다가오고 있는 요즘, 좌우를 불문한 여러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문장인데요, 재미있게도 많은 정치인들 이야기하는 것들 중 제 기억으로는 유일하게 제가 공감하는 말인 동시에 제가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와도 관련이 있어 이번 글의 소재로 사용해 보려 합니다.

사실,’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라는 말은 복지의 대상을 너무 제한적으로 고려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없는 신체적 조건 하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복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일자리를 그 매개체로 정한 것은 바로 일을 통해서만 국가와 포괄적 개인이 존속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방금, 포괄적 개인이라는 용어를 임의로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단어를 만든 이유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한 비용은 결국 누군가가 일을 하여 얻는 소득으로부터 충당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일을 할 수 있는 개인에 국한하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혼자서 살지 않는 이상(사실 혼자 살더라도)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물물교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꼭 필요할 것이고요. 사람이 돈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고 그것을 얻는 방법을 든다면 이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의식주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일단 위에서 언급했듯 이 세 가지 없이는 삶 자체를 살 수 없을뿐더러 행복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돈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이로부터 조금 더 나아가보자면 사람은 일을 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은 제외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을 통하여 얻는 성취감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동력이 되어준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은 행복한 삶(복지)의 필요조건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자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분류해보자면 공공사업 실행 등을 통한 직접고용, 직업교육과 일자리 알선 등을 통한 구직자 지원, 그리고 세제혜택 등의 인센티브제공 및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키우기 정도가 될 텐데요, 하지만 직접고용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과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는 비판, 구직자 지원의 경우 정부가 시장, 혹은 구직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해 주기 힘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일자리 키우기 정책은 어떤가요? 현대기술은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의 비대칭적 성장도가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현재의 제도 하에서 시장의 힘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개선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고용인 1인당 근무시간이 일정한 가운데 생산량과 이윤이 증가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면 같은 기술 하에서 기업이 성장할 경우 고용은 늘게 되겠지요. 정부가 중소기업의 성장을 도울 수만 있다면 일자리 키우기 정책은 꽤나 희망적인 옵션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대 기업 정책은 대기업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을 것입니다. 과거 고도성장기 시절에 현재의 대기업에게 주었던 특혜를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형평성 측면에서 특혜를 받지 못하였던 중소기업에게 정부가 손을 내미는 것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업 활동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이 옳다는 가정하에서요. 효율성 측면에서는 어떤가요? 사실 상당수의 재화를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비하여 더욱 효율적으로 생산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경영과 생산의 효율성은 외부의 도움이 없는 한 경쟁 속에서 기업이 성장해 나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복지의 향상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생각하면서 효율성만을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효율성의 증가는 일자리의 증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자리 창출, 혹은 고용 증가를 위하여 효율성의 상실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효율적이지 않은 기업의 존속은 어려울 것이라는 것 또한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중소기업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 장기적으로 효율적인 대기업들이 많이 생겨나는, 즉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에 장벽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추상적이고도 어려운 것이겠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해법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요(스웨덴은 대기업 중심의 사회이지만 복지지출을 비롯한 모든 복지지표에서 우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면 이번 글은 더욱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좋은 개선안이 나오거나,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번 글은 충분한 연구 없이 작성하게 되어 모든 면에서 부족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복지정책을 실행해 나가기 위해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은 가장 필요한 요건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요건일 것이라는 면에서 일자리를 키우는 일은 유일하게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으로도 바람직한 복지정책이 아닐까요?

* 이 글은 지난 9월 14일에 있었던 블로그 운영진들과의 토론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씌여졌습니다. 운영진들의 의견은 차후 정리하여 본문에 써 넣도록 하겠습니다.

2012년 10월 4일 목요일

두껍아 두껍아 전세줄게 월세다오


 부동산 가격 하락이 문제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지난달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정적 세금 감면 혜택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부동산 가격에 대해 귀에는 들리는 말이 많지만 눈에는 분명한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고로 flyingbunny는 두꺼비집을 짓듯이 부동산 시장이란 무엇인지 모래 한 더미 한 더미 다시 쌓아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왜 집을 살까? 우선 공급은 외생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가격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거주'의 공급량과 '소유'의 공급량은 동일하지만, '거주'수요와 '소유'수요는 구분해 볼 수 있다. '거주'수요는 주택의 월세를 결정하고, '소유'수요는 주택의 매매가를 결정한다. 우선 인구 변화나 삶의 방식의 변화로 '거주가격'인 월세가 변한다. 한편 주택 '소유'에 대한 수요는 월세와, 가격상승기대, 다른 금융자산의 수익률, 그리고 '내집 마련'에서 오는 직접적인 효용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겠다.(단순화를 위해 앞으로의 분석에서 이 직접적 효용은 무시한다.)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은 '거주'에 두는 가치도 균형월세보다 높고, '소유'에 두는 가치도 균형매매가보다 높은 것이다.

 전세는 어떠한가? Kim and Shin(2011)에 따르면 전세는 일종의 Repo거래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빌려주는 데에 대한 이자와 아파트의 월세가 맞아 떨어져서 금융기관이 사이에 끼어 발생하는 비효율성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통찰력 있는 분석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집주인이 왜 주택을 팔아서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대신, 전세를 놓기로 결정하였는가는 논문의 주된 논의 밖이다. 아마도 주택 자체의 투자 수익률이 높아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세란 주택이라는 투자 상품이 있을 때, 금융 제약 때문에 집값 전부를 지불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나누어서 투자할 수 있도록 한 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

 주택에 대한 투자에서 오는 수익을 월세와 집값상승분으로 나누어 볼 때, 월세수익은 모두 세입자가 집값상승에서 오는 수익은 모두 집주인이 가져가는 것이 하나의 분배 방식이다. 똑같은 집에 대해서 전세금과 월세를 모두 관측할 수는 없지만, 사고 실험을 위해 암묵적 월세 가격이 있다고 해 보자. 세입자는 월세 현금흐름의 현재 가치를 전세금으로 나눈 값만큼의 수익률을 보장받으며, 집주인은 '(2년뒤 예상매매가 - 현재매매가)/(현재매매가-전세보증금)'만큼의 수익률을 기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주택이라는 금융자산을 쪼개어 구입하는데 세입자는 균형월세 변동에 따른 위험을, 집주인은 주택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부담하는 것과 같다. 부담하는 위험 종류에 대한 분배는 고정되어 있으나 수익률은 전세보증금을 올리거나 내려서 분배 비율을 바꿀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요즘 중대형 아파트 매매가는 하락하고, 전세 보증금은 상승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암묵적 월세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인구변화를 고려할 때, 소형아파트의 경우 '주거'수요가 증가했겠지만 중대형의 경우 감소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아파트 매매가 하락에 기여하는 한편 오히려 전세 보증금은 덜 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남는 부분은 주택가격 변동에 대한 기대이다. 아파트 가격 하락 기대로 아파트라는 자산에 대한 기대수익률이 떨어지자, 하락폭 일부를 전세 세입자에게 전가하는 통로로 전세보증금이 사용된 것이다.

 뻔한 이야기를 참 복잡하게도 말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분석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집값 이야기를 할 때에 '주거'에 대한 부분과 '투자'에 대한 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면 장기적으로는 '서민이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감정들을 부동산 가격과 따로 보아, 고민의 초점을 뚜렷이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세입자가 재계약을 하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인상을 요구해서 힘들어졌다고 하자. 이는 '주거'가 비싸진 게 아니라, (전세세입자로서 참여할 수 있던) 특정 투자기회의 수익률이 떨어진 것이다. 다른 요인이 그대로라면 '암묵적월세'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투자 상품으로서의 주택은 일종의 '화폐'와 같다고 느껴진다. 화폐가 '유동성'의 기능이 강하다면, 주택은 '가치 저장'의 기능이 강한 것이다. 어떤 나라가 성장하면 그 나라 화폐의 가치도 오르는 것처럼 그 나라의 부동산 가격도 (더 큰 폭으로) 오른다. 안정 궤도에 오르면 화폐나 부동산이나 가치가 정체된다. 한 나라의 경제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 '부동산 가격 안정'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위해 애쓰는 것과 비슷한 차원으로, 국민들의 질 높은 주거생활을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조: Kim, Shin(2011), "Financing Growth without Banks: Korean Housing Repo Contract," http://www.princeton.edu/~hsshin/www/housingrepo.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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