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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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일 수요일

시간, 아껴뒀다 어디에 쓰시게요?


시간, 아껴뒀다 어디에 쓰시게요?


-'시간'을 주제로 한 릴레이-

 
시간을 얻는다고 말한다. 시간을 아낀다고 말한다. 시간을 투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시간을 일종의 '재화'로 취급하곤 한다. 사람들의 '' 속에서 시간은 참 다양한 용도로 요긴하게 쓰이는 재화인데, 그 자체로 소비되기도 하고 다른 재화를 만드는 데에 '투입'되기도 한다.
 
Flyingbunny가 보기에 이는 참 아리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여느 '재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시간을 '얻다': 늴리리 군의 어머니는 늴리리 군에게 오늘 마트에 가서 저녁에 먹을 생선 한 마리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뾰로퉁해 있던 늴리리 군이 집을 나서려던 찰나, 갑자기 아버지께서 오늘은 외식을 하자고 전화를 하셨다. 늴리리 군은 '시간을 얻었네'라며 쾌재를 외치고 아버지께서 퇴근하실 때까지 컴퓨터 게임을 했다.
 
시간을 '아끼다': 늘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나빡세 씨는 2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를 만나러 시내로 나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버스를 이용하면 1시간이 걸리는 반면, 택시를 타면 직장에서 약속 장소로 30분 내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택시비가 훨씬 비싸지만, 그는 이 돈이 시간을 '아낀' 것에 대해 지불한 비용이라고 여긴다.
 
시간을 '투자하다': 성실해 양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다. 그녀는 늘 전교 1등을 도맡아 한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녀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돼"라고 답했다.
 
이제 한 번 냉정히 생각해 보자. 늴리리 군은 정말로 '시간'을 얻었는가? 늴리리 군이 오후 4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장을 보는 데에 보내든 컴퓨터 게임에 사용하든 그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나빡세 씨는 정말로 '시간'을 절약했는가? 나빡세 시가 오후 6시부터 630분까지 회사 발표 자료를 만들고 630분부터 7시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나, 6시부터 7시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나, 나빡세 씨에게 6시부터 7시까지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마지막으로 성실해 양 또한 중간고사 전 1주일 동안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의 시간을 공부에 사용했든 다른 일을 하며 보냈든, 어쨌든 지나갔을 시간임에는 변화가 없다.
 
"Flyingbunny,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며 아직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우리는 '시간'을 거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거래하는 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며 '시간'에 실려 있는 '행복감'이다. 늴리리 군이 만세를 외친 이유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자신이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빡세 씨가 비싼 택시비를 내고 '구입'한 것은 30분의 시간이 아니라, '30분 분량의 업무 완료'였다. 만일 버스를 탔다면 다음날 30분 일찍 출근하여 업무를 했겠지만, 택시를 탔기에 다음날 아침 단잠을 30분 더 즐길 수 있었다. 성실해 양이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투자'한 것은 '21시간'이 아니라, 21시간동안 다른 여가 활동을 하며 느꼈을 '행복감'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경제학자들은 '노동생산성'을 참으로 중요한 지표로 여긴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이란 '생산량''노동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여기서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김밥을 만드는 일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 김달인 씨는 김밥 공장에 취직하여 하루에 천 개의 단무지를 오차범위 0.1mm이내 1cm 굵기로 썬다. 그가 근무하는 김밥 공장에는 10명의 노동자가 하루 총 1만 줄의 김밥을 싼다. 왕편해 씨는 매일 가족들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느긋하게 김밥을 500줄 정도 싼다. 김밥을 만들며 보낸 시간''투입요소'로 본다면 김달인 씨의 노동생산성이 왕편해 씨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기회비용으로 포기한 행복감'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왕편해 씨의 노동생산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왕편해 씨는 생산에 투입한 '행복감'의 양 자체가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만이 아니라 '', 즉 그 시간동안 느끼는 '행복감'을 기준으로 경제학을 다시 써 보면 어떨까? 왜 돈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는지, 왜 선진국의 행복 지수가 후진국보다 낮을 수 있는지, 경제학자들이 평소 놓치는 부분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행복감'이란 주관적인 지수이므로 수량화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란 보이지 않는 '인적자본'까지 수량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일을 하는 데에 같은 1시간을 쓰더라도 AB보다 2배 더 재미있다면, A에 투입한 실제 '노동'B의 절반 수준으로 보는 새로운 계산법으로 세계 각국의 노동 생산성을 산출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진다.  

댓글 9개:

  1. 개인적으로 읽고 나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초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생산성의 지표가 이미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노동자가 있는데 둘 다 능력은 비슷해서 1시간에 TV를 1대 만든다고 가정해봅시다. 표면적으로는 생산성이 똑같지요. 그런데 선진국은 일을 안하고 여가를 위해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후진국에는 매일 내전이 터지고 여가시설도 변변한게 없어서 쉬는동안 딱히 할게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물가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선진국사람의 유보임금이 더 높아서 선진국 사람을 쓰는게 돈이 더 많이 들겠지요. 결국 "임금 당 생산성"을 생각하면 후진국 노동자가 더 높을 것입니다. 기업에서는 당연히 모든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후진국 노동자를 고용하겠지요.

    왜 선진국의 행복지수가 후진국 보다 낮을까의 문제를 제기하셨는데 포기해야 하는 행복감이 큰 만큼 높은 임금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일 일수록 임금을 적게 받게 되는 것 아닐까요? 임금을 적게 줘도 재미있으니까 하려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모든게 상쇄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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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포기해야 하는 행복감'이 임금에 반영된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 점이 '시간의 양으로 측정한 생산성'의 모든 왜곡효과를 상쇄시킬 것 같지는 않아요. 정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원배분 (포기하는 행복감이 작은 사람이 유보임금이 낮기에 기업은 이를 고용)은 이루어질 수 있지만, 효율성 향상을 위한 동태적인 노력은 '같은 시간 투입으로 많은 산출'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기업에서 사내근로환경을 개선하면 그게 '국가 생산성 지표'에 반영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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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물론 '행복감'이란 주관적인 지수이므로 수량화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저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대충이라도 수량화 할 수 있으면,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국가의 생산함수 같은 것을 calibration으로 approximation 하는 것은 정당화되는데, 굳이 '행복감'에 대한 approximation이 배척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좋은 답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g. 통일된 단위가 없어서? 그게 왜 중요한 이유일까요?)

    여튼 이 글은 저에겐 완전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요즘들어 점점 글들이 철학적이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곱씹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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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량화가 가능하다면, 비교가 가능합니다. 수량을 세면 되니까요.
      이 명제의 대우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면 수량화도 불가능하지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당면한 모든 생활의 조건(인간관계, 경제력 등)을 알더라도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산량은 비교가 가능합니다. 생산의 많고 적음은 세기만 하면 되니까요. 따라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 수량화가 가능하다는 것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수량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approximation을 시도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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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는 항상 경제학에서 관측하기 힘든 값을 알아내기위해 그것의 proxy를 영리하게 찾아내어 영리한 방법으로 원하는 값의 추정치를 얻어내는 것에 많은 재미를 느꼈었습니다. 예를 들면 헤도닉프라이싱으로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매기는 가격(가치)을 알아낸다던가 하는것이요. 하지만 역시 proxy를 통하는 방법에는 한계, 즉 오차가 있기 마련인데요, 현실에서는 실제값을 직접 알아내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을테니 결국 어떻게 더 나은 proxy를 얻는가가 관건일 것 같네요. 사람들이 자신이 시간을 통해서 산 행복감, 어떤 proxy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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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생각해도 proxy설정이 하일라이트일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네요. 계속 지금 단계에만 아이디어가 고착되어 있다면 써먹기는 어렵겠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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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리가 매 시간 포기해야 하는 행복감을 정확히 고려해서 임금, 노동여건을 선택한다고 보기는 힘들죠. 실제로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어떤 직장이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할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보니 대개 [사회적인 인식+ 임금] 만 보고 자신의 능력 하에서 이를 극대화할수 있는 직업(임금이 낮더라도 사회적인 인식과 대우가 좋거나, 그 반대이거나..)을 택하려고 하는거 같네요. 물론 이렇게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도 자신의 효용에 대한 정확한 추정이 아닌 proxy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거고 proxy로 삼는 기준이 실제 행복감과 괴리될수록 우리의 삶도 행복과 괴리가 커 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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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동생산성 이야기를 할 때 제 주된 관심은 노동자 입장에서 매시간 선택하는 문제라기보다 생산성이라는 '지표'의 문제였습니다. 물론 행복감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기대행복감'에 고려해서 직장을 선택한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행복'이 기준이 모호하고 무엇이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할지 확신이 없다고 말하면,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교환'의 효율성까지 부정하는 논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상품을 살 때 그 상품이 자기한테 얼마나 효용을 줄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가 답글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지적해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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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flyingbunny님 말씀처럼, 1)시간은 생산에 투입되는 요소, 2)효용을 주는 재화, 3)부존자원
    의 성격을 갖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생산에 투입할 경우, 그 양만큼 효용을 주는 재화로서 소비할 시간의 양이 줄어듭니다. 이는 생산에 투입되는 시간의 가치를 "포기하는 효용"으로 볼 수 있고, 반대로 시간을 재화로 소비했을 때의 가치를 "그 시간이 생산할 수 있었던 재화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flyingbunny님께서는 전자에 주목하셨는데, 전자와 후자의 방법으로 측정한 가치가 일치할까요 일치하지 않을까요?

    flyingbunny님께서 제시하신 핵심이슈는 w=MPL(단위노동 당 생산량)에서 "단위노동"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단위의 노동"을 "단위시간 당 노동"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도 이 글을 읽으니 꼭 제기해봐야 했을 의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밥"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밥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맨 위의 1), 2)의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시간의 특성은 시간이 부존자원의 성격을 갖기 때문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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