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환영회식사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책 추천-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특별한 관점을 담아 현실을 분석하거나, 어떤 현상에 대한 최신 이론들을 소개하는 그런 글이 아닙니다. 편하게 오며가며 부담없이 전철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쉬운 책 한권을 추천하는 그런 글입니다. 빡빡하게 진행되는 학기 초다보니 부담없이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다음 포스팅부터는 '알맹이가 있는' academic(?)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대학원 진학 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 달과 다음 달에 텝스 시험을 신청해 놓았고,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텝스 공부를 시작하고자 텝스 문제집 몇 권을 샀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입학하던 8년 전,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실시하는 텝스 시험을 쳐봤던 것이 유일한 텝스 응시 경험입니다. 그 이후에는 텝스 문제를 구경해 본 적도 없었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문제 유형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모르고 다만 토익 점수에 비해 텝스 점수는 보통 100점 정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만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집을 펴 보니 처음에 "진단평가"라는 제목의 챕터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현재 영어실력을 진단해볼 수 있는 일종의 모의 mini test같은 챕터였습니다. 일단 듣기부터 시작했습니다. 문제도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긴 지문의 경우 두번씩 들려주느니라 오히려 문제를 풀기가 수월했습니다. 다만 꽤 헷갈리게 만드는 보기들이 있어서 몇 문제 틀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생각보다 꽤 평이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문제의 '문법 part'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따로 영문법을 의식하고 공부해봤던 적이 없는지라 생각보다 문법 파트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저는 충격적으로 스무개의 문법 문제 중 무려 열개를 틀리고 말았습니다. 반타작을 한 셈이었죠. 그런데 제가 틀린 문법 문제중에는 정말 쉬운 문제인데 제가 생각을 잘 못해서 틀린 문제가 두 문제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저는 그 "쉽지만 틀렸던" 두 문제를 맞았다고 채점하고 스무개의 문법문제중에 열두개 맞았다고 문제집에 적어놓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이런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문제는 내가 몰라서 틀린게 아니야. 지금 시간이 촉박하고 피곤한 가운데 문제를 빨리 풀다가 실수한거야. 그러니까 이 문제에는 X표시를 할 필요가 없어!"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공부하면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저의 이러한 행동은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텝스 문제집을 펴보고 제가 몇 점 맞았는지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 텝스 시험도 아니고 그냥 도서관에서 30분 정도 시간 내서 풀어본 텝스 문제집의 점수가 제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 텝스 문제집에서 몇 개 틀리는지를 두고 친구와 내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저는 제가 문제집에서 틀린 두 문제를 은근 슬쩍 맞았다고 표시할 이익이 거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1992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시카고대학의 노동경제학자 베커의 부정행위에 대한 이론 SMORC(Simple Model of Rational Crime)를 생각해봅시다. 실제로 내용은 굉장히 복잡합니다만 SMORC의 내용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결국 "인간은 부정행위의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여 부정행위의 편익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 부정행위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정직성과 관련된 의사결정은 다른 모든 결정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비용편익분석만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다양한 실험 및 관찰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고 논문으로 만드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그 정도 발상은 경제원론 수업만 들은 신입생도 사실 할 수 있는 수준이죠. 

다시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제가 틀린 문제들 중 두 문제를 맞았다고 허위로 기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억지로 몇가지를 생각해낼 수 있었지만,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 그래도 스무개 중에 열개나 틀린 것은 좀 심했다. 그래도 열두개쯤은 맞아야 내 마음이 조금은 더 안정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일종의 자기 기만 효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제가 설령 스무 문제 중에 열두개를 맞았다고 가정한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모여있다는 학교의 졸업반 학생에게는 마찬가지로 상당히 부끄러운 점수입니다. 따라서 열개 맞은 것을 열두개 맞은 것으로 고치고 제가 원래 열두개 맞았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믿는다고 하더라도 저의 효용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점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아마 스무 문제 중에 열일곱개 정도 맞췄으면 조금 아쉽지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자기 기만을 통해 유의미한 자기 위안을 얻으려면 적어도 일곱개 정도는 더 맞았다고 채점을 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렇게 소심하고 쪼잔하게 겨우 두개만 더 맞았다고 조작을 한 것일까요?

또 다르게 생각해봅시다. 제가 열일곱개를 원래 맞췄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저는 이러한 부정채점을 하지 않았을까요? 텝스보다 훨씬 쉽고 저에게 익숙한 토익시험을 가정해봅니다. 토익은 대학교 다니는 동안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꾸준히 시험을 쳐왔고, 문제의 유형도 저에게 익숙할 뿐더러 텝스보다 훨씬 쉬운 시험입니다. 저는 거의 항상 토익은 950점 정도는 꾸준히 맞아왔습니다. 보통 문제집을 풀면 스무 문제에서 세문제 이상 틀리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집이 실제 시험보다 어려운 것을 감안하더라도 보통 스무 문제를 풀면 한두문제 정도 틀리더라구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스무 문제 중에 한두개 정도 틀릴 때라 하더라도 제가 텝스 문법문제를 채점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부정채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가 감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요. 비단 영어시험뿐만이 아니라, 교과서 "개념-check" 문제같은 것들을 풀 때도 이렇게 아주 작은 사소한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만약 자기 기만을 통해 안도감과 자신감을 얻는 것이 기대되는 편익이라고 할 때, 아무도 저를 감시하지 않고 저의 부정행위로 인해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도 않는 이러한 상황이라면, 스무문제를 다 맞았다고 허위로 채점하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게 저 자신에게는 가장 큰 효용을 주는 행위일것입니다. 이러한 SMORC의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열문제 틀린 것을 여덟문제 틀렸다고 조작하는 저의 행동은 효용극대화랑은 거리가 먼 행위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비이성적인, 그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최근 출판된 베스트셀러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은 '퍼지요인'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두가지의 동기부여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정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봐주기를 원하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도덕적인 사람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를 '자아 동기부여(ego motivation)'이라 합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을 속여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데 이를 '재정적 동기부여(financial motivation)'이라 합니다. 이 두 동기부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서 어느 정도 이득도 챙기면서 도덕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부정행위를 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입니다. 퍼지요인에 따르면, 저는 스스로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허용되는 수준의 작은 부정행위로 이득을 얻은 셈이지요.

이 책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motivation이 더 강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사람들은 왜 부정행위를 하는지, 그리고 '왜 틀린 두 문제를 맞았다고 채점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부정행위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하는지, 이런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제학의 틀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뇌과학의 틀을 가지고 와서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식 밖의 경제학]과 [경제 심리학]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댄 애리얼리가 쓴 책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알맹이 없이 첫번째 포스팅을 마무리짓기는 좀 찝찝하니 책 안에 있는 내용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밑에 있는 그림을 봅시다.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직관이나 SMORC의 관점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부정행위를 할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의 크기'나 '그 부정행위가 발각될 가능성'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거의 부정행위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영향이 없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내용을 다양한 실험 결과를 통해 귀납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납논리의 한계 상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인간의 심리와 사회 현상에 대해 몇 번의 실험 및 몇백. 몇천 명 수준의 sample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등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한 통찰이 상당히 설득력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리학적 방법론이 경제학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20년도 넘었고 행동경제학은 더 이상 '새로운 분야'라고 하기에는 우리 경제학도들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주제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잘 적용하여 연구에 이용하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칩니다.


P.S 1 
대부분의 거대한 부정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비도덕적인 소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각각의 아주 사소한 부정행위들이 뭉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책 말미에 그에 대한 해결방안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리차드 탈러의 nudge와 상당히 유사해서, 지속적으로 도덕성을 상기시키고 부정행위를 하는 방법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고 거기에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감시의 강도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지만 감시의 유무에는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더군요.) 행동경제학자가 쓴 책이라 당연히 그런 해결책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실제로도 그 성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해주세요! 쉽게 쓰여져서 서너시간 정도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답니다.

댓글 3개:

  1. 재미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다만 글 자체의 사례에 대해서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같은 경우는 명백히 알고 있는데 단순히 체크를 잘못하거나, 혹은 '이건 분명히 전부 아는 내용인데 보기를 잘못읽었다' 싶은 몇가지 문제는 그냥 맞았다고(..)체크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저는 틀린문제의 '내용' 만 꼼꼼히 다시 체크하고 메모하는 스타일이라 내용적으로 아는 문제는 그냥 맞았다고 표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기만족(?)이라는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내용만 검토할때 틀렸다고 표시된 부분의 내용만 정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네요.

    아마 사람들의 심리도 이런 측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복습' 이 전제가 된 경우겠습니다만, 내용자체를 알고 있다면 굳이 틀렸다는 체크를 하고 나중에 불필요한 학습량을 늘리기 싫다는 동기도 있을것 같네요.ㅎ

    답글삭제
  2. 그럼요 실버쏘온님! 물론이죠... 지적해주신 대로 그런 동기가 분명히 엄청 크죠ㅎㅎ 그냥 며칠 전에 텝스 문제집을 푸는데, 우연히 채점하다가 이 책 내용이 생각이 났어요. 사실, 저도 실버쏘온님과 같은 이유로 맞았다고 채점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만 제가 이 글 본문에 쓰지는 않았지만 이런 생각(본문 내용같은)이 들게 하는 한 가지 심리적인 요인이 더 있었던 거 같아요.

    우선, 이 텝스 문제집의 경우, 영역별로 맞은 개수에 따라 실제로 텝스시험에 응시하게 되면 예상되는 점수를 연결시켜 보여주는 표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공부하려고 문제집을 푸는 성격도 있었지만, 제 시험 점수가 몇 점이나 나올지 좀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차이점이 있었던 거 같아요... 조금 더 맞은 개수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요! (묘하게 실제 시험보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의 내용이 문제집 풀때가 아니라 실제 시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예를 들어 이 것이 실제 시험이고, 감시가 매우 허술해서 제가 허위로 채점하는 것이 가능한 상황일 경우를 생각하면, 그 때 과연 내가 몇 문제나 틀린 문제를 맞았다고 채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만일 제가 60점 정도 맞은 시험을 70점이나 75점 정도 맞았다고 조작할 가능성은 상당해 보이는데 반해 100점이나 95점이라고 써서내지는 않을거 같아요.

    그렇다면 왜 저는 이런 상황에서도 100점이라고 조작하지 않는 걸까요? 100점이라고 조작하면 그것이 너무 눈에 띄어서 적발될까봐 그런걸까요?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이유가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생각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면서 여러가지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하나하나씩 실험을 통해 평가해보더라구요! 꽤 재밌어요. 읽어볼만 해요ㅎㅎ

    답글삭제
  3. 댄 애리얼리! 이번 방학때 우연히 알게 된 학자인데 이렇게 책도 소개해주시니 반갑네요.^^ '자기기만' (마킹을 마음대로 한 것 치고는 어감이 좀 세지만요)의 이유를 '편익'이 크다는 데에서만 찾지 않고 '비용'이 작아지는 데에서 찾자는 게 핵심 내용일까요?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