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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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내가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

몇 주 앞서서 roundmidnightflyingbunny님이 기회의 평등에 관하여 글을 써 주셨습니다. 그 중 flyingbunny님의 글은 제목에서부터 "당신이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은?"이라고 묻고 계셨는데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답해보고자 합니다.
 
최근(오늘)flyingbunny님이 언급한 John Roemer"Equality of Opportunity"를 조금 읽어보니 '기회의 평등'이란 개념이 상당히 넓게 정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회의 평등의 개념의 핵심을 추려 말하면 다음 과 같습니다: 각 사람이 그의 합당한 보상만큼을 가져가는 것. (실행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동의를 하고 나면, 그 다음 사람들 간 논란이 주로 일어나는 부분은 '합당한 보상'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우선 이 보상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생산성입니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인 능력주의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생산성은 자신의 노력 여하뿐만 아니라 타고나는 것, 환경적인 것에 대한 영향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roundmidnight님과 flyingbunny님의 글에서 논의가 되었던 지능을 예로 들자면, 태어날 때부터 지능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생산성이 대체로 낮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능이 태어날 때부터 낮은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므로, 저는 개인의 생산성으로 보상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각 개인이 노력한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도서관에서 매일 열 시간씩 똑같은 강도로 공부한 개인들은 같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도 올바른 기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열 시간 공부를 했더라도, 주의가 산만하게 태어난 사람은 열 시간 공부를 하는 것이 엄청난 고역이었을 반면에 집중력이 높게 태어난 사람은 아주 수월하게 열 시간 공부를 해치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가 산만하게 태어난 것이 그 사람의 책임은 아니므로 저는 이에 따라 보상하는 것은 옳지 않게 느껴집니다. (사실 노력의 정도라는 것이 애매모호한 개념인데, 저는 이런 식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는 어떤 환경이 주어졌을 때, 같은 환경이 주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 개인의 노력의 상대적 위치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Roemer의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아까 지능이 낮은 사람들 중에서 노력의 상대적 위치가 상위 25%인 사람은 지능이 높은 사람들 중에서 노력의 상대적 위치가 상위 25%인 사람과 동일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듣기에 그럴듯한 제안이지만, 저는 이에 반대합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국 학생과 한국 학생을 생각해 봅시다. 미국과 한국의 다른 교육문화로 인하여, 한국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보다 대체적으로 노력의 정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특정 한국 학생과 미국 학생의 노력의 정도가 동일하다면, 그 미국 학생의 자기 그룹에서의 노력의 상대적 위치는 한국 학생의 그것보다 더 높을 것이고, Roemer의 기준에 따른다면 한국 학생은 미국 학생보다 보상을 적게 받아야 합니다. 이에 동의할 수 있나요? Roemer 본인도 상당히 고민되는 이슈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Roemer는 결국 상기의 미국 학생이 한국 학생보다 더 자발적 노력을 많이 했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기준은 틀리지 않았다고 변론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발적 노력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노예들과 지주들을 생각해 봅시다. 노예들은 지주가 강제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100의 노력을 하고, 지주는 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0의 노력을 합니다. 이 경우에 100의 노력을 하는 노예는 0의 노력을 하는 지주와 동일한 보상을 받아야 하나요? 노력의 자발성이 없는 만큼 노예의 노력은 저평가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저는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합당한 보상에 대한 궁극적 기준은 노력을 하느라 힘든 정도(disutility of effort)’입니다. 이렇게 보상을 하면 위에서 발생하는 난점들이 해결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댓글 3개:

  1. 글을 엄청 밀도있게 써주셔서 여러 번 읽으며 생각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지만 화두를 던지고자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보상"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무언가가 있어야 보상이 나올텐데 세상 모든 사람이 0.1초 노동에 무한한 disutility를 느끼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사람들에 비해 노동에 대한 disutility가 한없이 낮다고 합시다(하루종일 일해도 무한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생산성이 동일하다면 나머지 한 사람의 생산이 모든 사람을 부양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럴 때 disutility에 의한 보상을 하면 그 한 사람보다 나머지 사람들이 더 높은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없다면 나머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먹고살지 못하고 죽게되는데도 말이죠.

    저는 보상의 기준으로 반드시 생산량(기여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사례가 이 주장의 심정적 근거에 불과한 것 같아 마음에 좀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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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보상의 정도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 노력과 성과 중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둘지에 대해서는 부문마다 다소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이라는 것이 자기 스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경우 성과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적인 음악을 추구하고 또 굉장히 열심히 하는 음악가인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싶다고 해서 그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보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보상을 얻고자 한다면 그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음악으로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할 것이고, 그에 맞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으로부터의 보상에 주안점을 두는 사람이라면 성과는 어쩌면 중요한 잣대는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이 나타낼 수 있는 성과에 만족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보상 부문에 대해서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공부를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단순히 집중을 안 한채 오랜 시간 동안 책상에 앉는 것이 바람직할지, 아니면 집중을 하거나 좋은 아이디어를 착안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는 것, 노력한다는 것, 열심히 한다는 것 등에 대한 개념 정의의 문제도 있습니다. 가령, 노력의 부문에서는 노력의 강도를 포함시킬지 말지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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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도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느냐 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핫 보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예로 인터넷에 보면 동전 여러개를 수직으로 세우는 기인들의 사진이 있는데요 그 것이 아무리 힘든일일지라도 높은보상을 줄순 없겠죠
    결국 ''보상''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상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가치있는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생산성,성과와 같은 요소를 보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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