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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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일요일

세 가지 시간

Karam Jo

오늘도 난 바닥을 세밀히 살피며 걷는다, 아니, 긴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잘못해서 시간의 늪에 빠지면 늙어버린다
조심하자, 아직은 성숙해질 때가 아니다

Chap. 1
걷다보면 가끔, 마치 맑은 봄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길을 흔들어 놓듯 출렁이는, 시간이 머무는 장소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이곳을 피해서 지나가려 애쓰지만,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이렇게나 바쁜 시대에 바닥만 바라보며 걷다가는 앞에 있던 사람과 부딪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기 십상이어서 다들 그렇게 그냥 늙어가기 마련이다.

시간의 늪을 찾아내려고 애쓰던 나는, 곤충의 애벌레를 앞으로 던지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던져진 애벌레들은 시간의 밀도에 따라 번데기가 되어 떨어지거나, 아주 드물게는 성충이 되어 내 앞을 날아다니기도 하였는데, 그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들을 항상 들고 다니는 일은 보통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폐기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곤충의 애벌레가 아닌 올챙이-애벌레보다 보기 좋다-를 길거리에 투척하는 방법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올챙이가 시간의 늪을 통과하면 그 밀도에 따라 몸집이 커지고, 뒷다리가 생기거나 뒷다리와 앞다리가 함께 생기기도, 혹은 곧바로 개구리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도 하여, 내가 그곳에 빠져버리면 대략 얼마만큼이나 늙어 버릴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올챙이를 수백 마리씩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고, 바닥에 던진 올챙이를 다시 수거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에-길바닥이 더러워진다- 이 방법 또한 폐기!

결국 이렇게 늙어간다.


-Breaking News-
The New York Times
Nov. 26th, 1952
Discovery of the 'time swamp' spread on a vast region in a small country in east asia called 'South Korea'!

Three months ago, Lieutenant Williamson (35) ...




또 귀 울림이다
하늘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모멘텀을 갖고 날아가던 새들이 바스러지며 사라져 간다
그리고, 느려져 가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이 나타난다

Chap. 2
비가 내리는 오후 세시, 보통 때라면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셨을 창밖 풍경이 평평하고도 세밀하게 다가온다. 엷어진 붉은 빛깔의 투명해져버린 가로수 사이로, 빗방울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바닥에 닿는 소리에 끊임없이 젖어드는 거리를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 몇 시간 전에 친구가 사다준 핫초코를 잊고 있다. 연습장과 책들로 무거운 책상위에 버려진 컵을 집어 든다. 서늘한 실내공기에 가속도를 받은 나의 소중한 핫초코는 이미 식어버렸다.
'데울까?'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해버린 설거지 거리는 이미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생각하다가, 이미 늦가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전자레인지 안이... 더럽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페이퍼 작성에 집중하느라 레토르 식품만 데워먹은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하다가 고작 칠 일,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만에 집 안이 얼마나 지저분해 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감탄한다.
도저히 컵을 넣을 수 없는 모습의 전자레인지 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에 나가지 않은지도 꽤 오래 되었음을 깨닫고는 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 놓은 짙은 회색의 후드티 하나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맞는 늦가을의 비가 차다. 하지만 생각보다 따뜻한 바깥공기에 마음이 놓인다. 아마도 습도 때문이리라. 비오는 날의 거리가 흔히 그러하듯, 오늘도 사람들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만이 주변을 울려 퍼진다. 가라앉은 느낌의 날씨가 나를, 거리를 안정시킨다.

작업 중인 페이퍼가 생각난다.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는 풀리지 않는 문제 하나와 함께... 눈에 보일 듯 선명한 그 결과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함에 매료되어 난 그 문제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단 하나의 실마리, 영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다.

여러 목소리가 중첩되어 일정한 패턴의 알 수없는 울림이 되어버린 시끄러운 카페 안에서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점원에게 세 번에 걸쳐 '핫초코'를 외친 후 스티머가 만들어내는 익숙한 소리가 추가 된 공간을 잠시 둘러본다.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즐거운 듯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노트북을 펼쳐들고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다음 문장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람이 보인다. 그녀도 나처럼 몇 날 며칠에 걸친 노력을 단 한 순간에 보상해 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갓 나온 따뜻한 핫초코를 받아들고, 나는 다시 비가 내리는 십일월의 오후에 발을 딛는다.






저녁 열한시,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소파에 몸을 묻는 시간
던져진 몸과 함께 리모콘이 떨어진다. William Orbit의 Via Caliente
그리고 잠시 후, 단 한 번도 경험해 본적 없는 시절로 스며든다

Chap. 3
누구나 적어도 하나쯤은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있던지, 어떤 날씨인지에 관계없이 듣는 순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딘가로 빠져들어 가버리는 노래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Mazzy Star의 Fade into you가 그 중 하나이다.

어느덧 십일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고, 겨울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오랜만에 온 비로 인해 젖은 도로를 차들이 그 특유의 물바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오랜만인 비와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신사동 가로수길을 찾는다. 특이한 상점들의 쇼윈도를 살피며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를 한가로이 걷는 일이 즐거웠던 이 길은 이제 사람들로 북적이고, 내가 즐겨 찾던 레스토랑과 카페는 하나 둘 씩 사라져 간다. 그렇게 나의 추억은 하나 둘 씩 사라져 간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길을 건너 샛길로 들어선다. 조금 전보다 많이 어두워진 이곳까지 이젠 상점들이 들어와 있다. ‘세월 참!’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아무렇게나 옮긴다. 한적해진 거리를 즐기며 오거리의 모퉁이를 돌던 중, 오른 편 구석,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다.'

어느 저녁의 담배연기 자욱한 반지하 카페. 어둑한 실내의 무거운 공기 사이로 Mazzy Star의 Fade into you가 오래된 벽지의 냄새와 함께 느린 듯 흘러나온다. 지나치게 커다란 수조안의 인공수초, 그리고 반짝이는 공기방울 사이를 만족이라도 하듯 헤엄치는 물고기 뒤편으로 출입문과 레지스터에 켜 놓은 스탠드의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주저앉은 소파에 앉아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하얀색-한 때는- 머그에 담긴 커피의 빛나는 깊은 어둠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이 뜨거운 커피 잔도, 불편한 소파도, 그리고 어둡고 숨 막히는 이 공간도 모두 이곳에 있다.

'위잉~!'
외투 주머니에 넣은 왼손 안에서, 머리에 입력되지 않는 느낌이 전해진다. 손을 올려,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빛이 눈부시다.

고개를 들어 다시 카페를 바라본다.

차가운 십일월 밤공기의 어두움을 물고기가 헤엄쳐 지나간다.




맺는말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하여 세 가지 시간, 즉, 물리적 시간, 상대적 시간, 그리고 개인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물리적 시간은 우리가 현상을 통하여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아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세상의 시작,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물은 그 모습이 변하는 것, 즉 노화를 통하여 이 시간이 우리 주변에 현존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생명체는 이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며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 시간이 변하는 일은 없다.

상대적 시간은 나와 나를 둘러 싼 세계 사이의 다름, 즉 나의 유일성으로 부터 생겨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은 남들과는 다른 패턴을 보이게 된다. 같은 일을 하면서, 사람마다 그것을 끝마치는 속도가 다른 것은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우리들 안에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데, 가끔 찾아오는 이 상대적 시간의 급격한 수축을 ‘영감’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시간은 자신만의 세계, 즉 추억, 혹은 상상 속에서 단절성과 반복성을 가지고 흐르고 있으며,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음으로부터, 즉 나의 존재로부터 생겨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측정되거나 관찰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사람은 어쩌면, 이 개인의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하루하루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 가지 시간은 ‘시간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다. ‘앞으로 십년’, ‘지금부터 십분’이라는 식으로 우리는 이 ‘물리적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주어진 것이라면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물리적 시간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물리적 시간으로 수치화 되었다고 착각되는 상대적 시간이다. 이 상대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산다.

시간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댓글 3개:

  1. 세가지 개념의 시간들에 대해 가격을 메길 수는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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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난 반 오프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 말인데요... 생각해보니 시간이 상대적으로 빠르고 느리게 흐르는 장소가 있다는 말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되는 것 같아요. 과거에 장소 a와 장소 b에서 시각이 같았고 그 이후 a에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흘러갔다면 a에 있었던 사람이 다시 시간을 거꾸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b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즉 타임머신과 시간의 늪은 논리적으로 동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임 자리에서 이야기했던 또다른 주제인 몸의 세포가 젊어지는 것은 또다른 세팅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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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지만 타임머신과 다른 점은, 시각이 같았던 그 '과거'보다 더 과거로는 갈 수 없다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제가 공부했던 범위까지의 물리학으로는 빛의 속도에 근접한 운동을 통해서 다른 계보다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친구가 60살이 되었을 때 26살인 채로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운동 시작 전의 과거로 가는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빛의 속도에 가까운 운동을 통해 시간의 어긋남을 만드는 장치를 타임머신이라 한다면, 타임머신은 미래로만 갈 수 있는 반쪽짜리 타임머신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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