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회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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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7일 월요일

Summers의 메모장

 
“우리끼리 얘긴데, 세계은행이 선진국으로부터 저개발국가군(LDCs)에 오염유발산업(dirty industry)의 이전을 더 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늘은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해보고자 합니다. 1991년 말, 세계은행(World Bank)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Lawrence Summers(이 분은 현재 벤처 캐피탈회사에서 엔젤 고문(advisor)으로 일한다고 합니다.)가 무역자유화에 대한 협상 중에 그의 후임자였던 Lant Pritchett과 나눴던 메모가 유출되면서 세상이 떠들썩해졌습니다.

‘유독성 폐기물을 제3세계의 저개발 국가에 넘기자’라는 패기(?)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메모는 경제학자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잘 담고 있습니다. 먼저 그 근거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Summers가 첫 번째로 제시한 근거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발생되는 건강문제에 대한 비용이 선진국보다 저개발국가에서 더 적다는 겁니다. 건강손실 대한 사회적 비용은 오염 탓에 질병이 생기고 이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이 살아있었더라면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의 합으로 계산될 수 있는데, 따라서 가장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국가에서 유해성 폐기물을 처분하는 것이 심지어 논리적으로 완전무결(impeccable)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오염의 양이 클 때, 오염의 한계비용역시 커진다는 것입니다 (즉, MC'(Q)>0). Summers의 생각에는 아프리카는 지나치게 공기가 깨끗해서 공기의 질이 LA나 멕시코시티에 비하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환경오염이 크게 발생되는 산업들은 교통, 전력생산 같이 거래대상이 될 수 없는 산업들이라는 점, 그리고 고체 오염물질의 단위당 수송비용이 너무 높다는 점 때문에 세상 모든 이들의 복지향상을 도모할 수 없던 부분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근거는, 미관상의 이유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깨끗한 환경을 수요하는 것은 매우 소득탄력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좋은 환경이 주는 건강에 대한 도움이나,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죠. 주로 50대 이상의 남성에 발병하는 전립선암(prostate cancer)은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데 좋은 지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전립선암에 걸릴 때까지 선진국은 1000명당 5명 미만이 죽는데 비해서, 저개발 국가는 전립선암에 걸리기도 전에 1000명당 200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쁜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많다는 거죠. 
 
또 한 가지 시각에 장애를 줄 수 있는 먼지들을 방출하는 산업은,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오염에 대한 우려에 대해 상품처럼 국가 간 거래가 가능하다면, 이를 테면, 시각에 장애요인이 되는 먼지를 채집하는 기구가 있어서 그걸로 먼지를 모아서 선진국에서는 돈을 주고 저개발 국가에 이것을 팔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지가 증진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The Trolley Problem
 
사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마음속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이슈임에도, 경제학을 배운 저도 저 논리를 딱히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곰곰이 따져보니, 사람의 목숨을 비용으로 저렇게 처리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죽음’과 ‘사망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애초에 사람의 목숨을 비용으로 떠넘길 수 있는 문제인지를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정의란 무엇인가』의 초반부에 이런 예시가 나옵니다.
 
“열차가 운행 중 이상이 생겨 제어 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대로는 선로에 서 있는 5명이 치여 죽고 맙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길을 돌릴 수 있는 레버가 눈앞에 있고, 레버를 바꾸면 전차를 다른 선로로 보냄으로써 5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른 선로에 1명이 있어서 그 사람이 치여 죽고 맙니다. 어느 쪽도 대피할 시간은 없습니다. 레버를 바꾸시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답은 5명을 살리는 것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한 명에 대한 보상비용이 더 적게 부과되며, 5명이 살아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의 총합이 한명의 경우보다 클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실제로 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저는 그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별로 결정하고 싶지 않은 문제거든요.
 
여하튼 판단기준이 되려면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를 테면, 여러분들이 쌍둥이를 가진 부모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아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서, 쌍둥이 한명은 5명이 속한 레일에 묶여 있고, 다른 한명은 반대편에 혼자서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결정을 하고 싶으십니까? 레버를 그래도 돌리시겠습니까?
 
이런 결정들이 체계적이지 않기에 공리주의는 꽤 오래전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고,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공리주의의 가정인 효용의 기수성(cardinality)을 버리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선호는 어떻게든 서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전체에 대한 고려는 기수성을 버리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공공경제학의 논리에서 항상 논란이 되는 문제가 이 부분이라고 하니까요.
 
‘사망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경제문제를 판단하는 데에 하나의 기준은 될 수 있겠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이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 지에 대한 문제는 저에게도 꽤나 골치아픈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비용문제
 
상태를 지나치게 정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인식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이야 선진국에서 저개발국으로 오염을 이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환경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비용보다 오염을 이전하는 비용이 싸다면, 계속해서 기술을 개발할 시점을 미루고, 오염을 이전하는데 드는 비용이 높아져서 선진국 수준으로 저개발 국가들이 오염된 날이 다가 와서야 기술을 개발하는데 열을 올릴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의 결정과 한 기간이 지나서 저개발 국가에서 오염에 대한 한계비용이 증가한 상태를 고려할 때의 결정과는 달라질 수 있고, 이것을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태적인 결정과 동태적인 결정의 경로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태모형에서는 저개발국가의 오염에 대한 한계비용이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있으니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Summers의 의견에 동의하실 수 있으신가요? 혹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Reference

L. Summers(1991.12.12), 'summers memo' : http://en.wikipedia.org/wiki/Summers_memo


댓글 2개:

  1. 좋은 문제제기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수적인 효용을 더한 사회효용함수를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만일 사람들이 개인 단위로 자기가 마실 오염을 사고팔수 있고, 자유롭게 거래가 이루어진다면 소개된 경제학자들의 논리대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부끼리 체결한 조약에 개인은 그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 논리가 위험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사회적 분배/배분 상태를 비교할 때, 파레토효율성으로는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status-quo를 유지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물론 효율성만 따졌을때입니다. 정의는 이보다 더 넒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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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기수적 평가는 사회효용함수에 대한 논의 이외에도 어떤 시장의 효율성, 그러니까 자중손실(DWL)의 크기를 논할 때도 쓰이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기수성은 개인이 아닌 ‘사회’전체의 기준에서 평가할 때 쉽게 눈에 보이도록 하기위해 자주 도입되는 것 같습니다.

      2. 고전학파적 입장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사람들의 의사가 모두 평등하게 국가에 반영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잘 대표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저도 개인을 모두 동등한 원자적(atomistics) 경제주체로 가정하도록 배웠습니다. 혹자는 이를 ‘스미스적 공화주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국가가 정말 그 사회구성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점은 저 개인적인 생각에는 ‘현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국가’와 사회구성원들 간의 의견이 불일치 될 수 있다는 점은, (개인의 의지의 합=사회의 의지)라 여겨지던 근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에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난 ‘개인의 출현’이 화두였다면, 현대에는 모든 개인들의 합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인 ‘국가(또는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재등장’이 화두 인 것 같네요. 국가는 시스템을 지배하고, 개인은 더 이상 시스템 전반을 이해하지는 못하니까요. 이런 철학적 흐름을 어떻게 경제학에 반영하면 좋을지가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3.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효용의 기수적 측정이라는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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